태양을 훔치다
태양을 훔치다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1.08.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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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수업 시간만 손꼽아 기다린 적 있다. 훔훔한 미소, 우수에 깃든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어서다. 하얀 분필 가루를 어깨 위에 잔뜩 뒤집어쓴 채 칠판 앞에 서서 판서(板書)를 열심히 하는 뒷모습조차도 멋있었다.

선생님은 수업만 끝나면 물 한 잔을 손에 받쳐 들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골똘히 잠기곤 했다. 심지어는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고 싶었다. 밤잠을 못 이룰 때 가장 먼저 떠오르던 모습도 그 장면이었다. 그때 일찍이 알았다. 한 사람을 아끼고 가슴에 간직하는 일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가를 말이다. 하지만 그 희열도 잠시였다. 봄꽃이 찬란하게 피어나던 어느 봄날, 선생님은 작별 인사도 없이 홀연히 학교를 떠났다.

건강이 안 좋아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문만 남긴 채였다. 그분이 없는 학교는 텅 빈 듯 허허로웠다. 그 후 며칠 학교를 결석하기에 이르렀다. 짝사랑의 신열을 호되게 앓게 된 것이다. 마지못해 등교를 하면 수업 시간에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교단만 바라봐도 그분의 잔영이 그곳에 남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환상은 국어 수업 시간마다 여지없이 깨트려졌다. 뿐만 아니라 국어 시간만 돌아오면 우리 반을 다시 맡은 노처녀 선생님의 앙칼진 목소리에 주눅이 들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국어 공부가 수학 공부보다 더 하기 싫어졌다. 시험만 보면 성적이 뚝 떨어졌다. 매 시험 기간마다 100점을 맞던 국어 과목이 10점, 20점에서 당분간 더는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고 1학년 때 일이었다. 국어 선생님을 몰래 가슴에 간직했었다. 어쩌다 교실 복도에서 단둘이 마주치면 선생님 앞에서 얼굴도 제대로 못 든 채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이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나만 보면 작문 시간에 글을 너무 잘 썼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을 연모(戀慕)하다 보니 수업 시간 중에 가장 손꼽아 기다린 과목이 국어였을 정도다. 그분만 교실에 들어오면 주위 전체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겨울철 난로 곁에서 멀리 떨어져 창가에 앉았었다. 이때도 그분만 교실에 들어오면 가슴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후꾼 솟구치곤 했었다. 가슴마저 콩닥콩닥 뛰어 얼굴까지 붉어졌다.

당시 국어 선생님은 순정적 사춘기에 이른 나에게 엄청난 광량(光量)을 안겨주는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면 지나칠까. 그분께 잘 보이려고 유독 국어 공부에 전력을 다하였다. 교복의 흰 컬러를 빳빳하게 세우기 위하여 전분으로 풀을 먹이곤 했다. 교복 치마를 싹뚝 잘라 무릎 위로 껑충 올라오게 입었는가하면 주름살 하나 없이 다림질하여 입곤 했었다. 이런 옷차림 때문에 번번이 교문 앞에서 선생님께 걸려 지적도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짝사랑을 해 본 사람은 다 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애틋하고 가슴 저린가를 말이다. 국어 선생님이 학교를 떠난 후 나는 태양 빛을 못 봐 시들어가는 화초처럼 매가리가 없고 매사 심드렁해졌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심신이 위축된 기분이었다. 까닭 없이 한숨이 절로 나오고 밥맛도 없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을 읽어도 내용을 제대로 간파할 수 없었다. 수업 시간에 몸은 교실에 앉아있지만, 마음은 늘 허공을 헤매곤 했다. 마치 실연당한 사람마냥 생기가 없었다.

새로이 온 국어 선생님의 나에 대한 걱정은 날이 갈수록 수위가 높아졌다. 국어 시험을 10점 맞던 날 그 선생님은 교무실로 나를 불러 수업 시간 태도가 왜 그러냐고 닦달까지 했다. 그리곤 다음 시험에 본래 점수를 회복 안 하면 안 된다고 단호히 못을 박기도 했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물론 성적이 현저히 낮아지는 것에 대한 걱정과 독려의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에 국어 선생님보다 선뜻 정이 안 가는 터였기에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다음 국어 시험도 스무 문제 중 하나만 맞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급기야 선생님은 반 아이들 보는 앞에서 시험지를 얼굴에 내던졌다. 그리곤 이것을 점수라고 맞았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선생님으로부터 시험지로 얼굴을 맞은 후 한동안 교실 바닥만 노려보다가 당돌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선생님은 알렉산더이십니다. 제가 볕을 쬐게끔 교단에서 잠시 비켜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말에 내재된 뜻을 아는 듯 반 아이들은 일제히 킥킥거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갑자기 회초리를 들고 내게 다가오더니 나의 등짝을 힘껏 후려쳤다. “그렇다면 네가 디오게네스란 말이냐”라고 음성을 높여 반문했다. 그 말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 질문이 의외였다. “네게 태양은 누구냐?” 이 질문에 나는 서슴없이 전에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 존함을 큰 소리로 답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달 후 일이다. 추석 명절 끝이라 가족들과 외가를 다녀올 때 일이다. 시외버스 대합실을 빠져나오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쌍의 남녀가 저만치 걸어오는 게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국어 선생님이 아닌가. 건강을 회복한 듯 전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 보였다. 곁엔 젊은 여성이 선생님 팔짱을 낀 채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자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보다 가슴이 몹시 아렸다. 선생님을 외면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지난날 남모르게 훔쳤던 마음의 태양이 가슴에서 그 빛을 잃은 듯하여 갑자기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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