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대회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것은 ‘디 오픈’이다. 올해로 149회째를 맞았다. 지난해 코로나로 중단됐다가 2년 만에 재개된 올해 대회에서는 미국의 신예 콜린 모리카와가 우승했다. 주최 측은 대회장인 로열 세인트조지에 대회 기간 중 매일 3만2000명의 갤러리 입장을 허용했다. 매일 5만명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후퇴는 없었다.
‘디 오픈’ 종료 이튿날인 지난 19일 영국 정부는 코로나 ‘자유의 날’(Freedom Day)를 선언하며 모든 규제를 풀었다. 마스크를 벗고 파티를 즐기는 영국 사회의 영상이 종일 TV를 통해 전해졌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지금 아니면 언제 할 수 있겠나. 추위가 오면 더 기승을 부릴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주 만에 수백만 명을 감염시킬 수 있다”(딥티 구르다사니 퀸메리대 교수), “코로나 입원 환자 증가는 제약을 없애는 게 잘못됐다는 것을 의미한다”(차드 나그폴 영국의사협회장)는 비판이 이어졌다. 전 세계 과학자 1200명은 국제과학저널 랜싯에 “영국의 실험은 비윤리적이며 전 세계를 위협할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영국의 이번 결정은 고령자들의 백신접종이 상당 부분 진행됐고, 확진자가 나와도 치명률이 높지 않으며, 10대 이하는 감염된 뒤 면역이 형성되는 게 더 안전하다는 논거를 바탕으로 한다. 7월 중순 현재 영국의 1차 접종률은 70%, 2차 접종률은 55% 정도이다. 이미 전체 인구의 8%가 감염돼 항체를 보유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집단면역상태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확산세는 여전하다. 통계에 따르면 영국에서 최근 입원한 환자 중 60%는 백신 미접종자이다. 이는 거꾸로 40%는 1차 접종자 혹은 돌파감염자라는 얘기이다. 치명률이 줄었다 해도 중환자와 사망자는 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영국의 자유 선언은 무모한 결정처럼 보인다. 실제 미국은 영국에 대한 여행경보를 최상급단계로 올렸다.
전 세계의 우려에도 영국은 왜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일까. 알려진대로 영국은 의회민주주의 역사만 800년이 넘는 곳이다. 왕의 권한을 제한한 마그나카르타(대헌장)가 만들어진 게 1215년이고, 그로부터 50년뒤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기 시작했다.
최근 보도된 에피소드는 흥미롭다. 감염병 분야 석학이자 영국의 코로나 봉쇄령을 주도해왔던 닐 퍼거슨은 록다운 기간 중 유부녀인 애인을 집으로 불러들여 바람을 피운 것이 들통나 사임했다. 둘 다 가정을 가진 이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퍼거슨의 사임 이유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퍼거슨은 바람을 피워서가 아니라 ‘동거하지 않는, 거주지가 다른 연인'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만나는 것이 방역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사임했다.
영국 사회에서 흔히 듣는 말 중의 하나는 ‘거짓말은 용서해도, 위선은 용서되지 않는다’는 게 있다. 위선은 자신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타인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 본인은 태연하게 저지르는 것은 위선이다. 거짓말 중에는 선한 거짓말이나 필요한 거짓말이 있지만 위선 중에 좋은 위선이나 필요한 위선은 없다.
코로나 자유선언과 직접 연관이 없는 듯한 얘기지만 이는 영국 사회의 밑바탕이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각인시켜준다. 세계 다수의 국가는 부정투표 소지 때문에 대리투표를 금지하고 있지만 영국은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맞닿아 있다. 밀은 ‘자유론’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자유도 누린다“고 개별성을 존중한다. 다양성과 독창성을 가질 때 사회는 발전하고 강제력에 의한 결정은 이성의 약화로 이어진다는 게 밀의 주장이다.
우리는 전쟁과 희생을 치르고 자유를 획득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펜데믹은 여러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 사이에 경계선을 나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공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한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통제와 봉쇄는 전염병 차단에 위력적으로 작동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재산의 권리라는 또 다른 가치를 배척한다. 상당수 국가는 생명을 앞세워 민주주의와 인권을 뒷자리에 위치시킨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서구식 민주주의는 개인을 중시하지만 공동체성에 대해서는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는 행위처럼 비쳐진다. 그럼에도 계해야 할 대목은 공동체란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무언의 압력으로 양심에 따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관용이 충족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발전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