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엄마 사람 친구에 관하여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엄마 사람 친구에 관하여
  • 스미레
  • 승인 2021.04.14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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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좋아하는 후배를 만났다. 사는 얘기, 영화 얘기, 곧 세상에 나올 그녀의 아기 얘기로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판은 달아올랐다. 성향이 비슷한 사람과의 만남은 역시 즐겁구나 느끼던 찰나. 그녀가 돌연 어두운 얼굴이 되더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아이 친구 엄마들 만나는 거 어때요? 전 그거 못할 거 같아요. 그 생각만 하면 우울해지고 입맛도 없고 잠도 안 와요.”

에이 별걱정을.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출산을 앞둔 후배에게 순하고 착한 말만 해주고 싶어 돌 고르듯 세심히 대답을 골랐다.

“생각보다 할 만해요.” 비로소 내 입에서 나온 답이 뜻 밖이었는지 후배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두 가지 단서가 붙었다. 나는 엄마들을 많이 만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조용한 우리 동네 특성일지도 모른다는 것.

해주고픈 말이야 길가의 풀처럼 수북했지만 더는 하지 못했다. 돌아가서 글로 정리해야지. 그리고 책이 나오면 고운 책갈피를 끼워 전해줘야지, 생각하며 카페를 나왔다.

사실 내겐 놀이터에서 ‘엄마 사람 친구’를 사귀는 일조차 데이트처럼 떨리는 일이었다. ‘운명처럼’ 친해지고 싶은 이가 생기면 사는 곳, 취미,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상대와 나의 궁합을 점쳐본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나면 언제 또 만날 것인지, 만난다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등등이 머릿속에 좌라락 펼쳐진다.

이때 심장이 뛰는 건 설렘과 긴장의 합 때문일 것이다. 외롭고 심심한 육아기에 마주치는 ‘친구 발생’의 순간은 그만큼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처음엔 그 감동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를 몰라 만나자는 만큼 만나고, 가자는 데로 따라 다녔다. ‘나는 엄청나게 명랑한 사람이에요!’라고 온몸으로 외쳤다. 구명조끼도 없이 표류하다 휩쓸리기 직전이었다.

내가 이럴 줄 어찌 알고는. 친한 지인은 일찍이 ‘엄마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조언을 남겼었다. 큰 아이 키우며 아이 친구와 엄마들에게 다 퍼줄 듯했더니 그 엄마는 물론 아이까지 자기와 자기 아이를 무시하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온 맘 다해 ’놀이터 친구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뭔지 내게 물었다. 아이가 당장 유치원만 들어가도 친구는 생길 텐데. 열심히 고개를 주억 거렸지만 벼락처럼 변하진 못했다. 여전히, 마음이 쓰였다. 아이 친구들을 보면 무한한 인류애적 사랑이 솟아났다. 신나게 놀고 헤어진 엄마들에게 카톡이 없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몇 년간 육아의 강물을 헤쳐오며 나에게도 나름의 방법들이 생겨났다.

한담 모임은 최소화하게 되었다. 불행 배틀, 뒷담화, 무의미한 이야기에 쓸 에너지를 아껴 정말 중요한 일이나 만남에 쓰기 위함이다. 대신 아이 유치원 행사급 모임은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한다.

물론 대단한 준비는 아니다. 아이에게 만날 친구에 대한 정보를 묻고, 엄마들과 나눌 이야기 거리를 탐색하는 수준이다. 운동선수 남편을 둔 지인을 만나기 위해선 그 선수에 대한 몇 달 치 정보를 모았다. 약속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용하고 익숙한 2차 장소가 있는지도 미리 알아뒀다. 아이들을 위한 퍼즐, 그림책, 간단한 간식을 챙겨가기도 했다.

준비가 되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설사 준비한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대화거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마음이 편할 때 발걸음도 가볍다.

너무 힘든 날은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미루었다. 충동적으로 놀이공원이나 캠핑을 가자는 등의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도착하는 순간 녹초가 될 게 뻔하니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날짜를 정해 일찍 출발하자고 한 후 날짜를 상의했다. 물론 캠핑은 아직도 엄두가 나질 않는다.

육아 7년 차쯤 되고서야 나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게 편해졌다. 관계에 무리하게 나서지도 않지만, 게을러지지도 않는다.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잘 들어주고, 그와 진심으로 공명하려 노력한다. 타인에게 많은 걸 기대하거나 기대지 않고 혼자만의 루틴과 나 자신을 돌본다. 그러자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 산뜻해졌고 만남도 즐거워졌다. 착각인진 몰라도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 역시 한결 편안해진 것 같다.

많지는 않지만 소중한 친구들도 생겼다. 우리는 서로를 정보 ATM기나 경쟁 상대 취급하지 않는다.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이기에 자주 보지 않아도 든든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듣지 않아도 느낀다. 소란하지 않을 때, 예컨대 함께 미술관 관람을 하거나 익숙한 골목길을 거닐 때 넘치도록 즐겁다. 육아가 유난히 버겁고 일상이 쳐진다면, 이 친구들을 만나야 할 때다. 잠깐을 만나도 아랫목에서 푹 쉬었다 온 듯 몸과 마음이 데워지는 다정한 사람들.

육아의 강을 건너며 자연스레 멀어진 사람도, 가까워진 사람도 생겼다. 어쩌면 포기를 배운 건지도 모르겠다. 모두와 잘 지낼 수는 없음을, 모두가 내게 친절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제는 안다.

“있잖아요, 엄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엄마예요.”

아이에겐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재주가 있다. 무심히 설거지를 하는 등 뒤에서 이런 말을 해 오다니.“아가, 고마워.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우리 아가야. ”코끝이 찡 울리며 답하는 목소리가 어쩌자고 마구 떨렸다. 순간, ‘엄마 사람 친구 사귀기’에 대해 후배에게 주고픈 글을 이만큼 써놨던 게 떠올랐다. 내성적인 그녀에게 어떤 정보든 주고 싶어 꾸역꾸역 글을 적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엄마 모임’이나 ‘엄마 사람 친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아이와 나는 거의 언제나 둘이었다. 아이가 내게 온 날부터 그랬다. 날이 좋으면 우리 둘이 꽃놀이 다니고 날이 궂으면 우리 둘이 한 이불 속에서 책을 읽는다.

나에겐 그 흔한 조리원 동기도 없고 정기 모임에서 만나는 엄마도 없다. 어쩌면 평생 갈 ‘육아 동지’를 사귀는 데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하진 않는다. 그동안 내 곁에는 아이라는 인생 최고의 친구가 생겼으니까. 엄마들과의 관계에 정답이란 없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후배에게 진짜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음을, 후배를 만나고 몇 달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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