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한 시절이 끝날 때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한 시절이 끝날 때
  • 스미레
  • 승인 2020.10.29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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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댓 살이 어린 그녀는 나와 심미관과 취향이 빈틈없이 같았다. 굴드의 셔츠와 브로이어의 의자에 대해 같은 온도로 밤을 새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 취향은 때로 인생을 함축하는바, 우리는 자라온 환경과 타고난 성정마저 비슷했다. 흥미로웠다. 나와 닮은 이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종일 배가 불렀다.

어느 날 그녀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연락을 해왔다. 글을 쓰고 싶다고, 글 쓰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며 씩 웃었다. 응원했다. 나도 그걸 몰랐으니까. 그래서 취업에 저당 잡힌 이십 대를 보내야 했으니까. 회사와 결혼 대신 자신의 즐거움을 쫓으며 살겠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라리 꿈결 같았다.

그렇게 자아를 찾아가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종종 쓰러지기도 했지만, 여린 마음을 추스르며 일어나는 그녀에게선 빛이 났다. 때마다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그녀가 대신 가줄 것만 같은 기대가 일었다. 나란 사람이 아이를 키우며 속절없이 닳아가는 순간에도 그녀는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선택한,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패션지 에디터가 되었다. 낯선 활기를 휘감은 그녀가 최신의 것들을 이야기할 때면 소리 없이 좌절했다. 디자이너들, 빈티지 와인과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책, 새로 개봉한 영화에 대해 나는 대체 무어라 말해야 할까. 이제 내 앞에는 그런 것들보다 만 배는 더 중요한 -기저귀 떼기, 아기 반찬 만들기 등의-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것들을 읊는 그 목소리에 어찌할 도리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때는 나도 그랬다. 아름다움과 예술을 열렬히 사모했고, 말이란 게 통하는 '어른'들과 일했다. 자유롭고 뜨겁던 시절을 향한 그리움이 씁쓸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유명 향수를 보내왔다. 고마웠다. 아직 아기가 어려 향이 강한 향수는 쓸 수 없다는 말은 뒤에다 숨겼다. 고마워, 감기 조심하고 잘 지내. 당장 아이에게 떠먹여도 좋을 만큼 무른 인사말이 목에 걸려버렸던 건, 훌쩍 나이를 먹어버린 기분 때문에.

전화를 끊고 우두커니 향수 상자를 바라보는데 아이가 내게 매달려온다. 그제야 내 옷과 발밑이 온통 축축하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 나는 지금 아이를 씻기고 나온 참이었지. 이제는 버둥대는 아이를 붙잡고 한바탕 ‘로션 전쟁’을 치러야 할 차례였다.

순간, 구름이 걷히듯 갑자기 '아무렴 어떠랴' 싶어졌다. 그녀는 ‘르 라보’의 때를, 나는 베이비 로션의 때를 사는 것이다. 그날. 아이에게 로션을 발라주며 한 시절이 내는 종소리를 들었다. 나의 20대가 안녕을 고하는 소리. 점점 육박해오는 그 소리를 더러는 무시하고 더러는 피했지만, 이제 소리는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곳에 닿아있었다.

내겐 학기나 학년, 혹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한 절기의 시작과 끝을 명쾌히 구분해 줄 무엇이 필요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시절의 경계는 자꾸만 모호해졌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아직 그대로인데, 거울 속의 나는 얼룩진 수유복을 입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들던 동요와 불안이 한 시절의 끝에도 존재함을 그제야 눈치챘다. 한 시절에 방점을 찍지 못한 채 사로잡힌 자는 되지 말아야 했다. 삶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기에.

몇 해가 지났다. 가끔 그녀는 내게 전시회 티켓이나 책을 보내왔다. 전시회들은 기한을 놓치기 일쑤였고, 책은 끝내지 못했다. 매일이 ​농번기처럼 바쁘고 긴박한 육아의 고단함에 그녀를 잊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을 지나며 엄마라는 책임과 가정이라는 안온을 동시에 얻었다. ‘아줌마’가 됐다는 폭풍 같은 자아 인식도 마쳤다. 깎여짐은 괴로웠지만 둥글어지니 편안했다. 내게 흐르던 관성이 멈춘 곳에서 비로소 새로운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이힐과 립스틱’이 곧 나라고 성채처럼 믿어왔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돌아보니 그해는 한순간 잊혀지기 싫은 스물 여섯 살의 나와 어서 빨리 완벽한 엄마가 되고싶던 서른 두 살의 내가 화해를 한 해였다. 매일 세력 다툼을 하던 그 둘을 한 몸에 담고 사는 게 어찌나 힘겹던지. 혹여 나의 작은 일부라도 사라질까 얼마나 끙끙댔는지.

그러나 나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나로 살아간 시간은 차곡차곡 내 안에 고여 나를 이룬다. 일곱 살의 나, 열 두 살의 나, 스물 한 살의 나. 각기 다른 시기의 내가 온몸으로 거쳐낸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음을 이제는 안다. 내 안에 고여있는 그 모든‘나’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오늘을 더 힘껏 끌어안는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나만의 서사에 귀를 기울인다. 나만이 갖는 내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어른일 테니까.

그날. 목욕을 마치고 로션을 바른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아이 볼과 내 손에서 풍겨오는 베이비 로션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나쁘지 않네.’

이런 삶이 있으면 저런 삶도 있는 거니까. 뛰는 것이 삶이라면 걷는 것도, 서있는 것도 삶일 테니까. 버스를 잡기 위해선 뛰어야 하고 길을 찾기 위해선 걸어야 하며, 민들레를 보려거든 멈춰서야 한다. 그 각각의 가치를 좋고 나쁨으로 따질 수는 없을 테니까. 이왕 멈춰선 거, 호젓하자. 여기에서 꽃도 보고 달도 보자. 그런 듬쑥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역시 나의‘한 시절’이며, 이 언덕을 넘으면 또 어떤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덕분에 나의 자리에서, 나의 것으로 살아감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여전히 기쁘게 응원한다. ‘르 라보’의 길을 총총히 걷고 있는, 나와 닮은 그녀를.

좋은 사람, 힘내.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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