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이 책은 도쿄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이어 주는 국제적 관문 역할을 했던 경성에 대한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안경마저 교사에서 허락을 받고 착용해야 하는 중학교, 독립운동가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는 서대문형무소, 친일파가 총독부 관리를 구워삶아 잇속을 챙기는 종로의 요릿집까지 경성에 대한 이모저모가 담겼다.
경성은 일제 강점기에 서울을 부르던 말이다. 경성역에서는 경부선(경성과 부산을 잇는 노선)과 경의선(경성과 신의주를 잇는 노선)을 오가는 육중한 파시형 증기 기관차의 위용을 볼 수 있었다. '파시'는 영어로 태평양을 뜻하는 퍼시픽(Pacific)의 앞 두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 증기 기관차는 네개의 앞바퀴와 여섯개의 회전 바퀴, 그리고 두개의 뒷바퀴를 갖추고 있다. 거대한 바퀴가 철로 위를 구르는 모습이 위압적이다.
한동안 경성역이 일본의 도쿄역이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본떴다고들 했지만, 실제로는 루체른역과 가장 닮아 있다. 정문과 반구형 돔을 보면 쌍둥이처럼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1971년에 발생한 화재로 루체른역의 본래 건물은 사라지고, 지금은 현대식 역사가 들어서 있다.
당시 학생들이 지켜야 할 학교 규율 중 '시간 엄수'와 '복장과 용모에 관한 규율'이 가장 엄격했다. 복장에 대한 규정은 어찌나 세세한지 안경마저도 학교의 허락을 받아야 쓸 수 있었다. 등교 시간 학교 앞에서는 복장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몽둥이 찜질이 가해지곤 했다. 일제 강점기 학교는 '규율의 제국'이었다. 느닷없는 손톱 검사는 기본이며, 소지품 검사가 불시에 이뤄졌다. 교실의 커튼을 여닫는 일조차 교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경성은 1920년 이래로 인구수에 비해 집이 터무니없게 모자랐다. 지방에 살던 농민이 일자리를 찾아 경성으로 몰리면서 집세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집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경성 변두리에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1930년에 경성부에서 토막민을 아현리, 돈암리, 홍제리로 집단 이주시켰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남자는 지게꾼, 인력거꾼, 막노동을 하고, 여자는 식모살이나 고무 공장, 간장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34년에는 토막집 2,902호에 14,179명이 살았다고 한다.
『경성에서 보낸 하루』
김향금 지음 | 라임 펴냄|248쪽|15,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