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소란한 세상, 말(言)이 넘치니 말문이 막히네 - 『눌변』
[서평] 소란한 세상, 말(言)이 넘치니 말문이 막히네 - 『눌변』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6.08.02 12: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라는 시 구절은 대상을 새롭게 빚어내는 인간 언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언어를 통해 리얼리티에 의미를 입히고 그렇게 형성된 상징 공간은 또 하나의 리얼리티가 된다고 말한다. 그 부피가 넉넉할수록 인생은 살 만한 것으로 느껴진다며 저자는 화자들 사이에 공동의 경험세계가 두터울수록 언어는 큰 울림으로 진동한다고 말한다.
사회학자 김찬호가 『눌변』을 펴냈다. 신문 등에 실렸던 칼럼을 모아 다시 고르고 다듬어 냈다.

굳이 책 제목을 『눌변』으로 한 건 저자의 사회학적 고찰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위 예가 들어 있는 대목을 계속 이어 보자. ‘(전략) 현란한 이미지와 선정적인 뉴스에 미혹되어 마음의 창조력이 고갈되고 있지 않은지, 발신에 대한 강박 때문에 경청의 여백이 위축되지 않는지 이따금 점검해볼 일이다.’ 저자는 마음의 창조력 고갈이 발신의 강박을 부르고 이는 다시 경청의 여백을 위축한다는 ‘생각하고 말하고 듣는’ 사슬을 얘기한다.

저자의 예를 들어보면,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앉았는데 마땅히 나눌 말이 없다면, 언어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이어가는 문화 유전자가 퇴화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무엇이 말문을 가로막는가. ‘생각하고 말하고 듣는’ 사슬의 어디가 작동 불량인가.

왜 제목을 『눌변』으로 했나, 이런 예를 보면 답이 나올까. 아프리카 벰바라는 부족은 누군가 잘못을 범하면, 마을사람들 모두 한자리에 빙 둘러 앉아 한가운데에 죄 지은 사람을 불러 세운다. 참석자 모두 한마디씩 하기 위해서다. 인민재판이 아니다. 주인공의 죄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이 자신에게 잘 해준 것, 그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노력한 점 등을 이야기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발언한다. 이 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범죄나 갈등이 매우 적다고 한다.

왜 제목을 『눌변』으로 했나, 이런 예문을 보면 이유가 훨씬 더 선명해질까. 성적 망언으로 물의를 빚는 고위직 인사들은 대개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일까. 그런 말들로 맞장구치며 쾌감을 나누는 유유상종 인간들, 유쾌하지 않지만 가면을 쓰고 딸랑딸랑 박수를 보내는 아첨꾼들, 그리고 비위가 거슬려도 감히 표현하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약자들이다.

동질적 폐쇄집단 내지 비민주적 권력관계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혀 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상상력과 분별력이 퇴화되어버렸다.

정작 말하고 싶지만 어느새 우리는 언어의 실타래를 잃었다. 양자·다자간의 소통을 어색해한다. 문화 유전자의 퇴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지경이다. 또 ‘말’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공동체 정신도 아프리카 한 부족만도 못한 것은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폭언을 듣는 이들은 폭언을 하는 이들의 그늘 속에서, 혹은 같은 진흙탕에서 비민주적 권력관계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눌변’의 눌(訥)은 말을 더듬는다는 의미다. 인터넷 시대에 눌언(訥言)은 미덕이 될까. 화려한 언변이 칭송받는 시대에 말재주 없는 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즉 말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하라는 뜻이리라. 성황 판단에 신중을 기하고 실행에 옮기기 전에 숙고하라는 뜻일 게다. 결국 마음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키워드가 눈에 띈다. 퇴화 그리고 여백이라는 단어다. 저자는 우리네 언어 소통 문화유전자 퇴화를 걱정하는가 하면 경청의 여백을 강조하는 가운데 침묵의 여백을 보여준다.

저자가 말하는 침묵은 눌변의 최대치로서 존재의 근원적인 바탕을 더듬으면서 보다 명료한 진실을 갈구하는 간절함이 거기(침묵)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여백이며 경청의 이면이라는 말이다.

무언(無言)의 경지에 이르러 살아 있음의 뉘앙스를 새삼 느낄 때 우리의 목소리는 청신한 빛깔로 재생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품격 있는 언어는 내면의 울림으로 자아와 관계를 빚어내고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이 사람을 무언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미디어의 혁신은 소통의 회로를 급격히 팽창시켰고 그 팽창은 연결의 과잉을 불러왔다. 트위터의 팔로잉과 팔로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과 카카오톡의 친구들은 계속 늘어간다. 지구 정반대쪽 사람들과도 쉽게 접속해 친구가 된다. 그들의 친구와도 친구가 된다. 온라인에서 확장되는 관계는 이미 두뇌의 정보처리 능력을 벗어났다.

이러한 관계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무연(無緣)이라는 관계의 결핍을 보게 된다. 일본에서 시작된 말이지만 우리도 실감하고 있다. 최근 OECD를 대상으로 ‘의존할 가족 친구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 국민들 대답은 최하 수준이었다. 관계의 과잉은 필경 관계의 결핍을 부르는 모순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발신의 강박이 주는 경청의 위축, 나아가 발신의 강박 속 말문이 막히고 이는 다시 공동체 사슬의 고리를 끊게 하는 악순환의 시대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저자가 좋아하는 단어, 여백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저자는 이를 다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눠 ‘보이지 않는 것’에 여백의 의미를 더해 준다.

이런 예를 보면 여백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중국 송나라 때 화원(화가)을 선발하는 시험, 문제는 ‘꽃을 밟고 달려온 말발굽의 향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라 였다. 꽃이나 말을 그리면 탈락. 꽃향기 꽃내음을 어떻게 그리라는 말인가. 그것도 말발굽에서 나는 향기를.

최고상은 흙바람을 따라 날아 오르는 한 무리의 나비를 그린 작품이었다고 한다. 예술가의 상상력, 인터넷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상상력을 갖고 여백 있는 삶을 주문한다면 무리일까.

저자가 강조하는 여백은 책 곳곳에 예쁜 시를 배치해 스스로 여백의 미를 보여 준다. 이 시는 어떤가.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 이끌고 와 서 있었다 /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 태연하였다 //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김종삼. 장편 2)

거지소녀의 10전짜리 두 개는 행동으로 보여 준 ‘눌변’이었다.

■ 눌변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 248쪽 │ 12,000원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