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알아보는 영화 언어] ‘벌새·82년생 김지영·윤희에게’
[명작으로 알아보는 영화 언어] ‘벌새·82년생 김지영·윤희에게’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8.16 0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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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거나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를 선정하여 그 영화의 명장면을 분석합니다. 대중에게 친숙한 영화의 장면 분석을 통해 간단한 영화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벡델 테스트는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자신의 만화 『주목할 만한 레즈들』에서 고안한 ‘영화 성평등 평가 방식’을 말합니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두명 이상 나오고 ▲이들이 서로 대화를 해야 하며 ▲대화의 주제는 남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어야합니다. 쉽게 말해 영화에서 이름을 가진 두명 이상의 여성이 남성이 아닌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이 나와야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앞선 언급처럼 벡델 테스트는 영화의 성평등을 가늠하는 척도로, 남성 중심의 영화 세상 속에서 여성이 얼마나 자주, 주도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지를 세 가지 잣대로 판단하는 지수입니다. 언뜻 보면 통과하기 쉬울 것 같지만, 의외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중엔 어떤 작품들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을까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영화감독조합이 주관하는 ‘벡델데이 2020’은 지난해 1월부터 올 6월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중 벡델 테스트를 바탕으로 성평등과 영화의 다양성 진작에 기여한 열편의 작품(‘벡델초이스10’)을 선정했습니다.

선정된 작품은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 ▲이옥섭 감독의 <메기>, ▲김윤석 감독의 <미성년>, ▲김보라 감독의 <벌새>,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 ▲최윤태 감독의 <야구소녀>,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희정 감독의 <프랑스여자>입니다. (이상 가나다순)

김보라 감독, 영화 <벌새> 스틸컷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애틀국제영화제, 멜버른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 출품돼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더불어 한국영화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으로 극찬 받았습니다. 영화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 역시 제56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차세대 감독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벌새>에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인 ‘은희’(박지후)와 그녀의 한문 선생님인 ‘영지’(김새벽)가 교감하는 순간들에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관한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 관한 여성들 간의 눈부신 연대가 있습니다. 영지는 오빠에게 맞은 은희에게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았지?”라고 말합니다. 이 대사에서 ‘누가’는 결국 가부장제가 여성 일반에게 가하는 억압과 폭력을 모두 담고 있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도영 감독,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당대의 한국 여성이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 사회문제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김지영’(정유미)이라는 캐릭터는 한국의 폭압적인 젠더 시스템 속에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고충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오롯한 ‘나’가 아닌 아내, 엄마, 며느리로 규정된 김지영이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개봉 당시 350만명이 넘는 관객수를 동원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개봉 당시 ‘남혐 논란’에 휩싸이며 일부 누리꾼들로부터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젠더 갈등’의 골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임대형 감독,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는 오타루의 아름다운 설경을 배경으로 레즈비언들의 사랑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가는 두 여성의 아픔을 곡진하게 그려낸 임대형 감독은 ‘윤희’(김희애)와 ‘쥰’(나카무라 유코)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성소수자들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말합니다.

이 외에도 윤희의 딸인 ‘새봄’(김소혜)과 쥰의 고모인 ‘마사코’(키노 하나) 등의 여성 캐릭터는 모두 자신의 삶의 어엿한 단독자로 등장합니다. 특히 뚜렷한 직업(카페 사장)이 있고, 항상 책을 가까이하는 영화 속 마사코의 모습은 영화가 여성과 노인의 삶을 재현할 때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슬기롭게 피해갑니다. 그러니까 마사코는 불치병을 앓고 있거나, 골방에 갇혀 신음하거나, 직업은커녕 취미도 없는 쓸쓸한 노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번 ‘벡델초이스10’에 선정된 영화들은 모두 여성 캐릭터를 능동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들이 더욱 많아질 때, 한국영화의 질적 성장 또한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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