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이러니, 아이러니, 아이러니… 『내 인생은 열린 책』
[리뷰] 아이러니, 아이러니, 아이러니… 『내 인생은 열린 책』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6.15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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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이 독자에게 어떤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다면, 루시아 벌린의 단편은 교훈을 남긴다. 인생은 아이러니라는 것, 그리고 그 아이러니 속에서도 우리는 늘 따듯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 할머니가 손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랄까. 

카버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벌린의 단편들 역시 시적이다. 시처럼 짧은 이야기가 시만큼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카버의 단편들이 특정한 플롯이 없이 이미지 위주로 전개되는 반면, 벌린이 많은 이야기들을 엮는 플롯은 아이러니다.  

가령 수록작 「1965년 텍사스에서의 크리스마스」에서 부잣집 부인은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홀로 몹시도 고통스럽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집에서 그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집이면서도 집이 아닌 곳, 지붕 위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과,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친정 식구들은 부인이 자발적으로 지붕 위로 올라가 요강으로 똥오줌을 내리며 살게 한다.

아이러니는 계속해서 이야기들을 엮는다. 새로 온 가정부인 멕시코 출신 루페는 상아 손잡이가 달린 식칼들을 훔쳐 후아레스로 가는 다리를 건너다 자신이 훔친 식칼에 찔려 죽는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허리를 굽혔다가 실수로 찔린 것이다. 

루페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그날 위스키에 취한 남편은 친구와 함께 경비행기에 선물을 잔뜩 싣고 멕시코로 건너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온다. 그런데 부인의 라디오에서는 이런 뉴스가 흘러나온다. “후아레스 빈민촌에 신비한 산타가 나타나 장난감과 함께 그곳 주민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식량을 떨어뜨리고 갔다는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 깜짝 놀랄 크리스마스 소식에 비극적인 일이 합쳐졌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햄 깡통에 한 양치기 노인이 맞아 숨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편은 그제야 부인에게 사정한다. “당장 그 지붕에서 내려와, 타이니. 제발.”       

스토리는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엮이고, 그래서인지 소설들은 더욱더 한 편의 긴 시로 읽힌다. 그런데 작가는 왜 이렇게 아이러니에 집중했을까. 소설들은 대부분 벌린의 경험에 영감을 받아 쓰였다. 세 번의 실패한 결혼과 알코올중독, 버클리와 뉴멕시코, 멕시코시티를 넘나들던 불안정한 생활,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는 작가의 삶은 소설로 꽃피웠다. 그의 삶 자체가 아이러니, 그래서 소설도 아이러니. 그리고 우리의 인생도…   

『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공진호 옮김│웅진지식하우스 펴냄│376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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