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세상이 그대를 밀어낼 지라도…
사랑하라, 세상이 그대를 밀어낼 지라도…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5.1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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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GV 빌런 고태경』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현실이 무언가를 싫어하거나 더 나아가 혐오하게 만들 때가 있다. 『이솝 우화』 속 여우가 높은 가지에 매달린 포도가 먹고 싶어서 펄쩍펄쩍 뛰다가 결국 닿지 않자 시다고 생각하고 돌아선 것처럼.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여우의 태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룰 수 없는 것을 일찍 포기했으니 현명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여우는 이룰 수 없어 보이더라도 끝까지 포도를 추구해야 했을까. 

소설가 김병운의 첫 장편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와 정대건의 장편 『GV 빌런 고태경』은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위로한다. 두 소설은 사회가 좋아하지 않는 사랑의 지난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놓지 않는 것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에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배우 활동을 하는 공상표(본명 강은성)와 그의 과거 연인이자 10년째 성공하지 못한 영화감독 김영우가 등장한다. 공상표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연인을 제외한 모두에게 철저히 숨기는데, 그것이 자신의 어머니를 실망케 하고 자신의 앞길을 망칠까 봐 두려워서다. 사회는 성소수자를 엄청난 변태 정도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공상표는 급기야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존재를 혐오하게 된다. 

그러나 헤어진 연인 김영우가 이태원 게이 클럽 방화 사건으로 숨지고 공상표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지만, 그 남자는 우리가 자신을 증오할 때마다 그 감정을 먹이 삼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런 고약한 괴물 같은 존재인 거라고요.”(255쪽) 방화범이 성소수자였다는 사실에 공상표는 자신 역시 그 방화범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혐오하고, 존재를 살해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 자신을 자신이 아니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과 결별한 공상표는 방화 사건과 관련된 인터뷰를 통해 커밍아웃을 감행한다. “자꾸 쓰고 말해서 우리가 우리를 수치스러워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거라고, 결국 내가 문제고 내가 잘못됐고 나만 사라지면 된다고 결론짓는 일을 끝내고 싶은 거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그는 그것이 관객에게도 진실한, 좋은 배우가 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GV 빌런 고태경』은 이뤄지지 않는 꿈만을 바라보며 사는 두 유예된 인생을 그린다. 감독이 갑작스럽게 빠지게 된 영화의 연출을 맡게 됐으나 부족한 시간과 재원으로 인해 영화를 망쳐버리고 일이 끊긴 30대 영화감독 조혜나. 그리고 한때 촉망받는 영화인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수십 년간 영화를 찍지 못한 50대 ‘GV 빌런’(영화 제작에 참여한 감독 및 주요 출연진들이 참석하는 영화 홍보 현장마다 찾아가 난감한 질문들로 제작진에게 창피를 주는 사람) 고태경. 둘은 캐릭터가 정반대이지만, 모두 영화를 지독히 사랑하며, 너덜너덜해진 삶 속에서도 언젠가는 자신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이어나간다.   

소설은 대부분을 이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을 표현하는 데 할애한다. 사회는 둘을 인간 대접하지 않고, 함께 꿈을 꾸던 친구들은 영화를 포기하거나 심지어 영화를 혐오하고 조롱한다. 급기야 조혜나는 고태경과 자신이 불나방이나 날벌레와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날벌레들이 포닥거리며 가로등 불빛에 쉼 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아마 고태경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불나방처럼 무모하게, 스크린에 쏘아지는 빛을 좇는 사람들, 영화에 인생을 건 사람들.”(151쪽)

그러나 조혜나는 고태경을 희화할 의도가 담긴 다큐멘터리(<GV 빌런 고태경>) 촬영 과정에서 자신의 유예된 삶을 긍정하게 된다. 택시운전사로 일하며 계속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고태경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태경은 조혜나가 처음 잡은 다큐멘터리의 프레임에 대해 이렇게 반발한다. “자네는 내가 불행하다는 걸 전제로 이 영화를 편집하고 있지 않아?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고태경은 거의 불행의 아이콘이던데. 난 별로 불행하지 않은데.” “소소한 기쁨의 순간들은 거의 없지 않아? 단팥죽을 먹는 순간이라든지.” “난 나름대로 나쁘지 않게 살고 있었다고. 그런데 자네가 내 인생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나서부터 몹시 불편해졌어. 자네가 나를 패배자라는 렌즈로 보니까.” (192~196쪽)

결국 성황리에 마친 <GV 빌런 고태경>의 GV(영화 제작에 참여한 감독 및 주요 출연진들이 참석하는 영화 홍보 현장, Guest Visit의 줄임말)에서 고태경의 말에 이 소설의 주제가 담겨 있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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