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작은 가슴이 나를 꼬옥 품었다
너의 작은 가슴이 나를 꼬옥 품었다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0.04.0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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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평소 문우들이 보내온 수필집, 시집, 소설집 읽기를 즐긴다. 그때마다 책 장 속 저자의 체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사인은 볼수록 정겹다. 나의 서재엔 고인이 된 문인의 저서도 몇 권 소장돼 있다. 그것에서 저자가 직접 쓴 사인을 발견하면 고인의 생전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오곤 한다.  요즘엔 SNS나 인터넷의 발달로 육필의 서간문을 대하기가 좀체 어렵다. 그래서인지 어느 편지를 대하노라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십수 년 전 잠시 타곳으로 이사를 한 적 있다. 당시 세 딸들이 고등학교, 대학교를 재학할 즈음이라 아이들은 친정어머니께 맡긴 후였다. 타지에서 큰 평형의 아파트에 홀로 지내려니 하루하루가 섬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때 생각해 낸 게 어린이를 상대로 한 독서 및 글쓰기 지도였다. 아파트 단지 내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을 그룹으로 결성해 글쓰기 및 독서지도를 하노라니 일상이 뜻깊고 보람 있었다. 

그렇게 이 년 여를 어린이들과 함께했다. 그곳에서 생활한 지 이 년 후 드디어 그곳  아파트가 매매돼서 다시 내가 살던 고장으로 이사를 할 때다. 당시 초등학교 삼학년이었던 진환이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사각의 플라스틱 통에 무엇인가를 담아 흰 봉투와 함께 내게 불쑥 내민다. 플라스틱 통을 열어보니 고소한 콩가루를 입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말랑한 인절미가 그 속에 수북하게 담겨있다. 봉투 속엔 흰 종이에 또박또박 써 내려간 편지도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내 읽자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진환이는 어려서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아버지 손에 자란 아이다. 진환이 아버진 그곳 재래시장에서 어느 떡집 배달 일로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다. 우연히 그 아이를 알게 돼 내가 독서지도 하는 아이들 그룹에 합류시켰다. 처음엔 그룹 아이들 어머니들이 진환이의 합류를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나중엔 오히려 진환이의 재능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처음 수업할 때와 비례해 날로 사고력, 창의력, 유창성이 향상됐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초봄 어느 날 동네 마트에서다. 그곳에서 물건을 살 때 옷차림이 남루한 사내아이가 마트 주인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름 아닌 진환이가 마트에서 과자를 한 봉지 훔치다가 주인에게 발각된 것이다. 마트 주인은 그동안 진환이가 수차례에 걸쳐서 물건을 절도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에게 눈까지 부라리며 또 한 번만 물건을 훔치면 경찰서에 신고하겠다고 겁박까지 했다. 나는 곁에서 그 광경을 보다 못해 진환이가 훔친 과자 한 봉짓값을 대신 치렀다. 그리고 차마 그 아이를 두고 발길을 돌릴 수 없어 진환이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무엇 때문에 도둑질을 했느냐?” 며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필경 어린아이가 남의 물건을 훔치기까진 말 못 할 사연이 있을법한데, 진환이는 고개만 푹 숙인 채 내가 묻는 말엔 대꾸도 않고 자신의 옷자락만 만지작거린다. 하는 수 없이 근처 분식집에 데리고 가서 김밥과 만두를 주문해 줬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진환이는 그제야 어렵사리 입을 연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면 먹을 음식이 없단다. 떡집서 일하던 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벌써 한 달 가까이 병석에 누워 있단다. 그래서 배가 고파 마트에서 빵이며 과자를 간간히 훔쳐 먹었다고 한다. 그런 진환이 말에 딱한 생각이 든 나는 배가 고프면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음식을 먹자고 권유했다. 그러자 진환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그 애는 수시로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때마다 나 역시 혼자 먹는 밥이라 진환이와 식사를 하는 날이 잦았다. 그때 그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하고 글을 써보도록 권유했다. 그 아이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하는 일에 놀라우리만치 큰 발전을 거듭했다. 급기야는 그 고장에서 개최한 어린이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거머쥐기까지 했다. 진환이를 지켜보며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즈막도 괜스레 마음이 심란하거나 의기소침해지면 진환이가 내게 전해준 손편지를 꺼내 읽어보곤 한다. 편지 속엔 나를 만나 행복했다고 했다. 또한 내가 베푼 고마움을 어른이 돼서도 잊지 않겠다고 큰 글씨로 쓰여 있다.

요즘은 어른도 매사 감사하는 일엔 둔감하다. 자신은 티끌 하나도 타인에게 베푸는 데는 인색하면서 남이 베푼 친절이나 배려 따윈 하찮게 여기기 일쑤다. 이와 달리 어린 가슴에 어찌 이런 지혜가 깃들어있는지, 오히려 내가 진환이에게 배울 점이 많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진환이와의 지난 인연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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