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빵을 권해요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빵을 권해요
  • 스미레
  • 승인 2019.11.21 1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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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빵이란 걸 먹게 된 무렵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종종 빵을 굽는다.

시작은 시판용 ‘머핀 믹스’였다. 그대로 섞어 굽기만 하면 되니 어렵지 않았다.

떼를 부리던 아이도 “빵 굽자~” 한 마디면 입이 들어갔다. 언제 심통이었냐는 달걀을 깨 넣고 밀가루를 조물댔다. 몰드를 고르고 구름처럼 부푼 반죽을 구경하며 신이 났다.

“빵 언제 돼요?” 오매불망 오븐 앞을 서성이다 잘 구워진 빵을 보여주면 “히야~” 탄성을 내뱉던 귀여운 내 아기.

그렇게 기다리는 일 외엔 딱히 할 게 없어도 달콤한 냄새와 기대감에 한두 시간이 훌쩍 갔다. 나로서는 빵만 번 게 아니라 시간도 번 것 같은 묘한 위안이 들었다.

미세 먼지니 장마니, 날씨가 사나운 계절이면 빵을 구웠다.

나가지 못하는 심심함을 그렇게 달랬다. 일상이 휘청휘청 불안한 날에도 빵을 구웠다.

모든 게 불확실한 순간, 재료를 오븐에 넣으면 틀림없이 빵이 나온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 웬만한 고민은 오븐을 여는 순간 사라졌다. 고민이라 봐야 그토록 얕았으니, 그 또한 다행이지 싶었다.

온순하고 소박한 질서가 그리운 날에도 빵 생각이 났다. 아이와 반죽을 치대다 보면 잡념이 사라졌다. 빵을 굽고, 치우고, 한바탕 먹이고 나면 땀이 흘렀다.

숭고한 노동을 마친듯한 개운함이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실력 주부와 아이의 제빵은 소박하게 마련. 우리의 메뉴도 여태 식빵이나 팬케이크처럼 간단한 것을 맴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단팥빵이 먹고 싶은 어떤 날은 팥을 삶아 소를 만들고, 찰떡빵이 먹고 싶은 날은 떡을 만들기도 했다. 내 손으로 만든 것에 내가 감탄하는 날이 늘어갔다.

절정은 아이 네 살 때였다. 매일 매일 오븐이 착실히 열리고 닫혔다. 궁금했다.

그 해에 궂은 날이 유독 많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그만큼 울적하고 불안했던 건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지?’

스스로 묻고 까무룩 슬퍼졌다. 노인들이 무기력해지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느낌 때문이라던데, 노인이 아님에도 그 마음에 쉽게 공감했다.

그때 내겐 ‘무언가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한다’는 느낌이 절실했다.

물론 그 대상이 아이는 아니다. 애초에 아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나는 타인을 조종하는 덴 관심도 없었으니까.

내 삶이 문제였다. 내 삶에 내가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것.

인간으로서 맘대로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는 데다,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그 자체가 수치이자 상처였다. 아이 이유식 만들고 남은 재료가 버젓이 식탁에 올랐고 집안은 아이 물건에 잠식당했다. 이 삶의 무엇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상실감.

마음이 데인 듯 아팠다.

그 와중에 빵 만큼은,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무엇이었다.

무슨 빵을 굽던, 거기에 연유를 붓던, 크랜베리를 넣던 그건 내 마음이었다.

밋밋한 흰 빵에도 바닐라 에센스나 계피를 넣으면 포인트가 생겨 반짝였다.

사소한 발견, 그러나 뜻밖의 도락이었다.

가족 모두를 위하는 일. 아이에게도 유익한 일이라면서 실은 나를 위해 쿠키와 스콘을 구웠다. 빵 굽는 냄새엔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힘이 있다던데, 그래서인지 그런 날엔 아이도 나도 순해지는 것 같았다. 따스하고 고소한 시간 뒤로 달콤한 성취감도 따라 나왔다.

이만하면 나 오늘 잘 살았구나, 싶었으니 종일 한 게 그뿐이라도 어떠랴 싶었다.

빵 반죽 같은 연쇄 반응이랄까. 이스트 몇 알에 주먹만 한 반죽이 대접만큼 부풀듯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작은 통제감이 삶 전반에 안정을 퍼뜨렸다.

빵 굽기는 무엇 하나 맘대로 하지 못해 쓰린 마음에 바르는 특효약 같았다.

계절에 어울리는 쿠션 커버를 장만하는 것, 소담한 식물을 키우는 것, 좋아하는 그림을 걸어두는 것, 마음 맞는 책을 탐하는 것도 마찬가지. 가끔 그런 것에 목숨이라도 걸듯 열을 내는 이유다.

얼마 전 오븐이 고장 났다. 벼르고 벼르던 제빵기라는 것을 그만 들이고 말았다.

그 간편함에 아이도 나도 매번 입이 벌어진다. 수고가 줄어든 만큼 새로운 시도에 거침이 없다. 호밀 가루를 많이 넣은 날엔 거친 독일 빵이, 오일을 많이 넣은 날엔 포카치아 같은 빵이 나왔다.

그러지 말고 고정 레시피를 만들어 적어 두라는 남편의 말은 듣지 않는다.

이것저것 넣고 빼며 이런저런 빵을 만드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얻은 빵 한 덩이에 좀 더 씩씩하고 활기찬 내가 되기 때문이다.

밥이 주식인 곳에서 빵 굽기는 일상을 비껴난다.

그 작은 예외성이 내 숨구멍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밥 짓기가 두 남자를 위한 일이라면, 빵 굽기는 홀로 ‘빵순이’인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의 일이기에 마음을 다한다.

엄마가 된 후 ‘나를 위한 나’는 희미해졌다. 더러 애가 타고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집안 어딘가에, 마당 한켠에 숨어 있을 것이다.

잠시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이렇게 튀어나오는 날이면 눈물 나게 반가웠다. 지금도 내가,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이토록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가을 오후, 아이와 빵을 굽는다. 정해진 레시피는 없다. 빵 익는 냄새와 온기, 아이의 웃음소리가 근사하게 어우러진다. 갓 구운 빵을 어울리는 그릇에 담아 내 앞에 놓았다.

육아 중 드물게 찾아오는 ‘내 마음대로의 순간’을 그렇게 즐긴다.

빵 한 조각에 또 부자가 된 어떤 날. 삶이 조금 더 말랑하고 폭신해졌다.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자연육아, 책육아 하는 엄마이자 미니멀리스트 주부.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쓰는 엄마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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