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흔적
지울 수 없는 흔적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9.09.0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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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어머닌 오늘도 내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며 서랍장을 연다. 그 속엔 작은 치수의 꽃무늬 원피스, 헌 운동화, 낡은 가방들이 가득 들어있다. 친정엘 가면 어머닌 나를 보자마자 급히 서랍을 뒤져서 정성껏 그 물건들을 싸주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싸주는 물건 보따리들을 어머니 앞에서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이런 물건 제발 주워 오지 마세요”라고 화를 내곤 했다. 그러면 어머닌 마치 꾸중 듣는 어린아이처럼 풀이 죽은 힘없는 목소리로, “어렸을 때 너희들에게 변변한 옷 한 벌, 좋은 책가방도 못 사 줘서 내가 너를 위해 샀다”고 말하곤 한다. 이즈막 어머니의 이런 행동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형제들마다 친정집만 가면 으레 겪는 일이다.

지난여름 어느 날 어머니 드릴 반찬을 준비해 친정을 찾았다. 그날도 어머닌 화려한 꽃무늬가 놓인 어린이용 치마를 서랍장에서 또 꺼낸다. 그것을 대하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한껏 좁혀졌다. 격앙된 목소리로 이 물건이 어디서 났느냐고 다그쳤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파트 근처 시장에서 나를 위해 직접 샀단다. 자세히 살펴보니 상표가 붙은 새 물건이었다. 어머닌 이번 물건만큼은 당신이 직접 구입 한 게 분명하다. 전과 달리 돌변한 그분의 언행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머니 기억 저편엔 장성한 당신 자식들이 여전히 지난날 코흘리개 어린아이 모습으로만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정집엔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어머니가 주워온 헌 옷가지, 신발, 가방 등의 물건들로 방마다 발 디딜 틈이 없다. 어머니 머릿속에서 치매가 그 병소(病巢)를 차츰 넓혀 갈 때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전엔 남편과 함께 친정집을 방문하다가 어머니께서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헌 물건들을 줍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것을 본 나는 순간 남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남편은 어머니가 치매 환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은 듯, “왜? 장모님은 쓰레기장을 기웃거리시는지 모르겠네”라고 한다. 그 말에 왠지 자존심이 몹시 상한 나는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젊은 날 당신이 겪은 뼈저린 가난의 고통이 오늘날 어머니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음을 남편은 쉽사리 이해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나없이 풍족하지 못하던 그 시절, 집안에 아버지가 부재였던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웠다.  당시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들기름에 볶은 구수한 김칫국과 따끈한 쌀밥을 먹는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울 정도였으니, 궁핍했던 삶을 어찌 이루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어머닌 우리들 학교에 내는 육성회비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머니가 심한 열병으로 앓아누웠다. 우리 형제들은 멀건 죽만 먹고 학교를 등교 했다. 학교에서 심한 허기로 쓰러지기 예사였다. 그렇게 한 달여를 몹시 앓던 어머니께서 앙상히 뼈만 남은 몸을 가까스로 추슬러 가발 공장엘 취업했다. 말이 가발 공장이지 규모가 작은 작업장에서 어머닌 일을 했다. 그러나 그 공장이 갑자기 망하는 바람에 어머닌 단 한 푼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이런 집안 형편이니 학교 육성회비가 자연 형제들마다 밀렸다. 우리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육성회비 미납 독촉을 자주 받곤 했다. 급기야는 학교 교무실로 수없이 불리어 갔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어머닌 학교를 찾아왔다

변변한 핸드백 하나 없던 어머니였다. 그날 육성회비를 내기 위해 나와 함께 교무실을 찾은 어머니는 교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벽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곤 치마를 들치고 속옷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었다. 이때 어머니 뒷모습에서 색색의 헝겊으로 기운 낡은 누더기 속옷이 들쳐진 치마 밖으로 확연히 내비쳤다. 그것을 발견한 나는 선생님들 보기에 너무나 창피해서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 후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고 며칠 동안 학교를 결석했던 기억이 요즘도 새롭다. 

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우리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않던 어머니다. 험난한 세파와 맞서 싸우면서도 역경 앞에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강인한 정신력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십여 년 전 막내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처음으로 대성통곡을 했다. 그 후 그토록 꿋꿋하던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심신이 작아졌다. 어머니의 머릿속 강력한 지우개인 치매마저도 자식 잃은 어미의 피맺힌 한(恨) 만큼은 가슴 속에서 말끔히 지우지 못하나 보다.

이제는 어머니께서 싸주는 헌 물건들을 거절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기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며, “ 어머니!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전하련다. 모처럼 어머니의 모습이 환하게 밝아지는 게 참으로 기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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