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계기는 올리브 갈색 곰 인형이었다.
똑바로 세우면 대략 20cm, 그렇다고는 하나 애초에 똑바로 세울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담요 천과 솜과 재봉실, 그리고 유리 비즈로 만들어진 보드라운 장난감.
지금부터 이야기할 ‘머그컵 한 잔의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아니다. 일으킨 것은 물론 헝겊 인형도 나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 날 그 인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더웠던 그날, 퇴근 후 돌아가는 길에 들렀던 역 앞 빌딩 잡화점에서 가격표를 붙이고 유리창 안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사하는 게 어때?’
몸통보다 조금 밝은 색의 눈동자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7쪽>
창문에서 비치는 빛에 떠오른 모습은 확실히 A호실의 히라노씨가 틀림없었다. 키는 큰 편에 새하얀 이목구비가 단정했고 많은 사람이 ‘잘생겼다’고 형용할 법했다. 한편, 나약한 인상도 있었다. 또렷한 눈썹이나 아몬드 형태의 눈은 늠름해 보인다고 할 수 있었지만, 얼굴의 아래쪽 절반이 그 인상을 뒤집고 있었다. 축 처진 입술의 양 가장자리, 가늘어서 존재감이 없는 턱. 체격이 주는 인상―나쁜 자세, 얄팍한 상반신의 느낌 등은 바로 구라씨가 말한 대로였다. <43쪽>
어쨌거나 지금 이야기하는 상대가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미래인과 예지능력자, 둘 중에서 고른다면 미래인 쪽이 그나마 무섭지 않다. 우연히 미래에 살고 있는, 자신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니까.
“그럼 그 미래인과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어째서인가요?”
“이유나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지난주에 어쩌다 알아차렸을 뿐입니다. 2005년의 A호실의 이 구멍과 2004년 B호실, 기타무라씨의 눈앞에 있는 그 구멍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71쪽>
『9월의 사랑과 만날 때까지』
마스오 유미 지음|김현화 옮김|소미미디어 펴냄|293쪽|1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