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보이지 않는 거울
[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보이지 않는 거울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8.04.05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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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우리말은 곱씹을수록 정겹다. 어디 이뿐인가. 뜻을 찬찬히 음미해보면 조상님들의 삶이 그 단위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조상님들은 고팽이, 쌈, 우리, 손, 쾌, 죽, 채, 토리 손, 담불 등의 말로 물건들을 셀 때 단위를 매겼다. 고팽이는 다 알다시피 새끼나 줄 따위를 사리어 놓은 돌림을 세는 단위이며, 담불인 경우 벼 100섬을 의미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양곡상(糧穀商)이 동네마다 성업 중이었다. 집안에 양식이 떨어지면 어머니는 이곳을 찾아 양식을 구입 하곤 하였다. 너나없이 집안 형편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쌀을 사러 가면 인심 좋은 양곡상 아주머니는 쌀 몇 되를 사도 나무로 만든 됫박에 쌀을 수북이 담아 주곤 하였다.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양곡 상 한 쪽에 놓인 나무로 만든 큰 말 통에 하나 가득 흰 쌀을 담아 보는 것이 절실한 소원이었다. 탄수화물이 비만의 적으로 간주되는 이즈막엔 어린 날 그 꿈이 무색할 뿐이다.

우리말의 물건 세는 단위를 떠올릴 때마다 조상님들 지혜와 넉넉한 인심을 새삼 깨닫는 것은 어인 일일까. 모르긴 몰라도 버선이나 그릇 등을 한 죽 사면 분명 한 두 개는 덤으로 얹어주었지 싶다. 

또한 조상님들은 물건을 남에게 팔 때 질량이 정확하고 양심적이었을 것이라는 추론마저 든다. 일례로 ‘우리’라는 단위만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우리’의 경우 기와 2,000장을 세는 단위란다. 만약 기와 2,000 장 중에 단 한 장이라도 속임수를 쓴다면 어찌 기왓장을 판매할 수 있었으랴. ‘쾌’만 해도 그렇다. 가령 북어 한 쾌가 스무 마리인데 이것을 팔며 북어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면 상품으로서 가치를 잃으므로 똑 고른 크기로 판매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과 비교해 본다면 조상님들은 늘 선명한 마음의 거울을 가슴에 지닌 듯하다.

며칠 전 동네 마트에서 반찬거리로 싱싱한 고등어를 한 손 샀다. 깔끔하게 포장되어 별다른 생각 없이 구입 했던 것이다. 한 손이라는 단위에 걸맞게 고등어는 두 마리가 포개어 포장돼 있었다. 집에 와서 생선조림을 하려고 고등어를 손질할 때다. 고등어 뱃속에 끼운 또 다른 한 마리의 고등어가 형편없이 크기가 작고 상태도 안 좋은 게 눈에 띠었다. 겉의 고등어는 크고 신선한데 왜 그 속에 끼어 있는 고등어는 겉의 것과 크기도 현저히 다르고 신선도도 떨어질까? 하는 의구심에 이어 왠지 속았다는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긴 어디 고등어뿐이랴. 언젠가 마트에서 구입한 열무 단 속에도 크기가 다른 열무가 속박이로 들어있었잖은가. 과일 역시 마찬가지다. 한 박스 속엔 알이 작은 게 꼭 섞여있다.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고 자부하던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이렇듯 그럴싸한 허울로 눈가림을 하는 일에 혈안이 됐을까?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은 거짓이오, 위선이며 치졸함이다. 내 것은 아깝고 소비자의 돈은 아깝지 않다는 뜻인가? 새봄엔 누구나 자신이 지닌 마음의 거울을 닦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인들 또한 매한가지다. 물건을 시장에 내 놓기에 앞서 양심의 거울에 늘 자신을 비추길 바란다. 질 좋은 물건은 물론이려니와 정량을 갖춘 물건을 판매함으로써 그에 합당한 물건 값을 소비자한테 받는 게 진정한 상도덕(商道德)이요, 제품의 경쟁력을 갖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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