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온천·홈쇼핑에서 ‘호모 콘수무스’ 발견! 『소비의 역사』
설탕·온천·홈쇼핑에서 ‘호모 콘수무스’ 발견! 『소비의 역사』
  • 정연심 기자
  • 승인 2017.09.1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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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역사』-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 496쪽 │ 25,000원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아내 앤 해서웨이에게 준다.” 1616년 임종을 앞둔 셰익스피어가 서명한 세 쪽짜리 유언장에 쓰인 구절이다.<15쪽> 유언장은 인간관계를 가장 솔직히 드러내는 고백서라던가. 아내에 대한 복수인가. 과연 가장 좋은 침대는 누구에게 주었을까. 숨겨놓은 애인? 아니면 홀아비가 된 늙은 친구일수도.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은 유언장에 마지막 존재감을 드러냈다. 소중한 물건을  친애하는 이들에게 차등 분배하겠다는, 사심 가득한 생애 최후의 의지. 그 속에는 물건과 사람, 시간, 역사가 오롯이 담겨있다.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콘수무스’는 매일 물건을 산다. 시간과 공간을 사고 예술, 과학, 의학을 사들인다. 가짜인줄 알면서 사고, 진짜를 가짜처럼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각자 제 지갑에서 들고나는 돈인데도 다 같이 힘을 모아 팔아주는가 하면, 절대 사지말자고 똘똘 뭉칠 때도 있다.  

무언가를 ‘사는 행위’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샤넬 백을 사는 것은 가방을 얻는 것일까, 샤넬이라는 기호를 구매하는 것일까. 우리가 돈을 쓰면서 마침내 얻는 것은 물질일까, 정신일까.

이 책은 소비하는 인간을 새로운 시각으로 사유하는 역사서다. 국가와 민족, 계급을 넘어 이뤄지는 소비 행위. 그 속에서 역사학이 주목하지 않은 인간의 내밀한 행위와 동기를 살핀다는 점이 새롭다.

인간 중심 역사를 연구하는 사학자 설혜심은 다양한 소비코드로 사람과 생활상을 읽는다. 저자는 “우리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소비는 지금까지 욕망과 쾌락을 위한 천박한 물질주의의 산물로 여겨졌다”며 “소비를 단순히 사치나 방탕과 연결시키는 낡은 사회적 통념은 소비를 진지한 연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책에서는 유언장에 기재된 물건과 양복, 드레스, 중국 도자기, 비누 등 다양한 상품에서 천태만상 인간의 얼굴을 확인한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돌팔이 약장수부터 원조 화장품아줌마 에이본 레이디의 방문판매, 최초로 대량판매와 할부제를 도입한 싱어사의 재봉틀, 소비생활을 변화시킨 쇼핑몰과 홈쇼핑 등 소비자 지갑을 유혹해온 판매방식도 알려준다.

설탕 한 알에서 제국주의 시대 흑인노예들의 한을, 저항과 해방, 연대의 장구한 역사를 발견한다. 수집과 병적 도벽, 성형 소비, 노년층의 소비 문제 등 사회 주변부에 놓인 소비행위에 대한 역사적 맥락도 짚어 나간다.

이 책은 익숙한 물건과 공간, 소비 행위와 동기를 바탕으로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다층적으로 드러냈다. 경영학, 사회학, 미학 분야에서 논의되던 소비를 미시적 관점으로 접근해 역사학의 한 주제로 부각시켰다 평가다.

‘소비=낭비, 사치, 방탕, 쾌락’이라는 오해와 편견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소비역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한 점이 신선하다.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물건과 공간을 소비라는 프레임으로 낯설게, 때론 비틀어 바라보며 사람과 삶, 시간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 정연심 기자

* 이 기사는 격주간 독서신문 1631호(2017년 9월 14일자)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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