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인터뷰] 철학자 김형석 선생 “인생 무너지는 건 독서의 빈곤 때문”
[송년 인터뷰] 철학자 김형석 선생 “인생 무너지는 건 독서의 빈곤 때문”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6.12.23 14: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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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 책 낸 97세 김형석 선생

[리더스뉴스/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윤동주 시인과 중학 동기동창, 1920년생으로 이달이면 98세. 아직도 책을 내고, 오라는 강연 많은 ‘국민 철학자’. 20년째 동네 야산 산책한다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얼마 전 백년을 살아보니 책을 냈다. 기자는 그렇지, 97세는 돼야 백년을 살아보니 라는 말을 할 수 있겠지 싶었다. 그러니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7세, 축복 받은 나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음도 또렷하고 논지가 분명한, 강연 잘하는 97세의 정정한 현역이다. '국민 철학자'라는 별명이 잘 어울린다. 선생이라고 불리는 게 좋다고 말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한참을 가고 길을 건너니 커다란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이렇게 멀리 온 적이 없다 싶을 정도로 서울 깊숙이 들어왔다. 교회 찻집 문을 밀고 들어서니 수수한 무채색 잠바, 작은 어깨, 가늘고 낮은 볕이 드는 창을 응시하는 뒷모습이 참으로 단아하다. 맞잡는 손도 선비 손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발음은 또렷했고 호흡은 스스로 잘 조절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논리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과장의 몸짓은 찾을 수 없었다. 맑은 시냇물이 저 아래만 보고 제 갈길 가듯 담담하다. 조용한 목소리는 들을수록 유장함이 묻어났고, 잠언 같은 한마디 한마디는 심연처럼 깊었지만 그 속뜻을 길어 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나이어린 기자가 당돌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연세가 연세인 만큼 옛날 이야기는 그야말로 무궁무진이다. “30년은 됐을 거에요. 삼성 LG 등 대기업 신입사원 연수에 강연을 많이 갔어요. 그 때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들 중에서 대학 4년 동안 고전 5권 이상 읽어본 사람 손 들어보라고” 손을 드는 사원은 없었다. 그 때 ‘젊은’ 김형석은 이 친구들이 과장 부장 등으로 승진하면 정신적 빈곤을 느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보세요. 그 친구들이 다 지금 임원들입니다. 그러면서 자꾸 인문학을 찾고 있어요.”

예측대로 정신적 빈곤은 거의 한 세대를 지나 고스란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30년전 경제개발 논리 속에 성장 발전만 추구하면서 기술제일을 외쳤던 시대의 물질추구 효율추구, 즉 문사철(文史哲) 홀대는 지금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마치 과외공부하듯 인문학 벼락공부하자는 건 아닌지 모를 지경이 됐다.

요즘 인문학 열풍은 30년 전 文史哲 홀대한 대가로 온 부메랑 효과

이러한 문제는 결국 교육의 문제로 귀결한다. 김 명예교수는 ‘콩나물 교육론’을 들려준다. 교육은 콩나물에 물주기와 같다는 것. “콩나물 시루는 물을 계속 줘도 빠져 나가잖아요? 그런 중에 콩나물은 자라요. 그러니 계속 물을 줘야죠.” 그런데 대부분 나이 50쯤 되면 콩나물에 물을 안 준다고 말한다. 즉 공부도 안하고 책도 안 읽고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그래도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은 괜찮다고 했다. 김 명예교수가 말하는 ‘공부’는 8할이 책읽기고 ‘괜찮다’는 얘기는 제 구실을 하는 것이라고 기자는 자신 있게 ‘의역’했다.

인터뷰 내내 어떤 질문에도 만면에 웃음이다. 오래 사는 비결인 것 같다.

“그릇에다 콩나물 담가 놓으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그러면 썩어요. 새로운 걸 배우지 않고 자신이 아는 것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 이론을 50년, 100년 후에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것, 망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김 명예교수는 늘 깨어 있으면서 읽고 생각하고 배우는 걸 그저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역시 교육 탓이 다는 아니지만 교육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중고등학교부터 팔십 넘을 때까지 ‘독서’가 바로 콩나물에 물주는 일이에요. 독서를 통해 지식을 받아들이고 자라는 거죠. 우리 사회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인다면 그 건 아마 오십 넘은 사람들이 모두 책 읽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독서가 습관이 돼야 합니다”

독서 예찬은 끊이지 않는다. 미국에 있을 때 얘기를 들려준다. 미국에선 교사가 학년 초에 책 5권을 소개하면서 그 중 3권은 꼭 읽어보라고 말한다. 이런 식이다. 성경을 읽어라 하는 게 아니라 창세기를 읽어라, 또는 예수를 알려면 마가복음을 읽어라, 벤저민 프랭클린을 알려면 그의 전기를 읽어라 라고 콕 찍어서 알려준다.

인간 수명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성숙됐다는 말을 들으려면 몇 살이면 될까. 30은 아무래도 이른 것 같고, 40정도? 늦어도 50이면 공자 말대로 지천명(知天命)인데 성숙되지 않을까. 그러나 김 명예교수는 60쯤이라고 못 박는다. 아니, 정확한 표현은 60쯤 되면 ‘성숙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75세까지는 성장하고 생산적인 일도 가능하고 창조 능력도 발휘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콩나물에 물 주듯 사람도 평생 독서해야,  60~75세가 인생 황금기

“그래서 친구들과 정의를 내렸죠. 인생 황금기는 60부터 75까지라고요” 인생 황금기가 60부터라는 말은 건강기능식품이나 보약 광고에서나 봤던 것 아닌가. 역시 97세의 안목에선 육칠십도 한창(?)이라는 말이다. 75세쯤이면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렵고, 그래도 콩나물을 죽 줘왔으면 85세까지는 연장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역시 97세다운 말이다 하면서도 기자는 ‘85세까지 물을 줘야 한다니, 맙소사’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종교는 삶에 위안이 되고 삶은 종교에 감사한다.

그러면서 “나는 아직도 콩나물에 물주고 있어요”라고 한다. 초등 1년부터 치면 90년을 콩나물에 물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기자는 또 맙소사 했다. 그렇게 물을 주는 덕분에 많은 책도 썼고 수많은 강연에 나섰고 그리고 지금도 세미나 참가하고 이런저런 강연을 한다. “안병욱 선생이나 김태길 선생도 보면 85세 정도까지는 계속 성장하더라고요.” 안병욱 김태길, 두 선생 모두 고인이 됐지만 김 명예교수와 함께 한국 철학계 트리오였다. 1960, 70년대 철학을 꽃피웠던 분들이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앞으로 계획이 있는지. “길게는 못 세우고, 2년 계획은 있어요.” 아, 그러면 정말 100세다. 1년 후에는 책이 한 권 나온다. 이미 원고를 보냈고 한 권을 더 쓸까 생각 중이라고 한다. 작년 올해 이태동안 강연집을 포함해 책을 세권이나 냈다. 아직 집필력이 왕성하다. 더 나이들면 못 쓸 것 같아 무리해서 세 권을 냈다.

앞으로 2년치 계획 ‘완성’, 책 한 권 더 내고 강연도 더 했으면

그러면서 문장이나 어휘는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상은 더 좋아졌다고 자평한다. 강연은 힘들어도 계속하고 싶은 맘이다. “안병욱 선생은 문장도 좋고 강연도 잘했고, 김태길 선생은 문장은 좋은데 강연은 좀 딱딱했죠. 나는 문장과 강연, 둘 다 가지고 있는 셈이죠. 근데 강연이 좀 더 반응이 좋은 것 같아요. 1년만 더 했으면 좋겠는데, 한계가 오겠죠?”

김 명예교수는 오래전이지만 한 해 60만부나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다. 인세도 상당했을 터, 다 어디 쓰셨나 궁금했다. “애들 교육했죠, 뭐”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그럴법도 하다. 슬하에 6남매이니.

나지막하고 가느다란 초겨울 햇살이 들어오기엔 창틈이 그렇게 비좁지는 않아 찻집은 안온했다. 차 한 잔을 마주하고 만면이 웃음으로 가득하니 오후가 더욱 풍요로웠다. 100세 넘게 사세요, 오래 오래, 인사는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기자를 배웅하는 웃음이 소년 같았다.
사진= 이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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