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구겨진 감정을 따뜻하게 펴주는 다리미 같은 글과 그림-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
[서평] 구겨진 감정을 따뜻하게 펴주는 다리미 같은 글과 그림-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6.11.02 17: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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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뉴스/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책을 ‘읽는’ 즐거움은 마음의 수양에 있다. 머리가 명징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책을 ‘보는’ 기쁨은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며 저자와 직관적으로 마주함에 있다.

이 책이 바로 ‘보는’ 기쁨을 주고 있다. 제목이 특이하게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 이다. 저자는 오리여인이고 글과 그림을 다했다. 분량도 만만찮은 280쪽이다. 만만찮다는 표현은 그림 못지않게 글 또한 풍성하기에 저자 수고로움의 분량도 크다는 말이다.

저자 오리여인은 이십대 초반부터 글을 썼다고 책 맨 뒤 ‘마치며’에서 말하고 있다. 30대 초반(아닌가?)으로 추정되는 이 익명의 여인은 그 익명의 그늘 안에서 신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기자는 책을 순식간에 읽었다. 아니 보았다. 그러면서 한줄한줄 그 글은 이십대초반부터 썼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 깊이를 보여 놀랐다. 그리고 대체로 따뜻한 위로, 푸근한 사랑, 어머니 품 같은 그리움 같은 원초적 감성을 잃지 않아 더욱 예쁜(저자는 귀엽다 라는 말이 좋다고 했다. 138쪽) 글이 됐다.

책은 머뭇거리는 나에게,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일렁이는 사랑의 시간, 흘러가는 일상의 기록 등 4부로 나뉘어 있으며 ‘주제별 우리말’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책 맨 뒤에 숨겨놓았다. 저자 말대로 읽힘을 당하는 즐거움을 노린 것 아닐까.

이러한 글들이 범하기 쉬운 감정의 과잉은 없어 읽는 내내 보는 내내 편안함을 준다. 그게 일단 이 책의 첫째가는 미덕이다. 책 앞부터 보자. 이 오리여인(왜 오리일까, 정체가 갈수록 궁금하다)은 지적으로 빵빵하고 아주 뷰티풀한 여인은 아닐 것 같다는 선입견으로 읽고 보기 시작했다. (대체로 이런 류의 글은 너무 예쁜 여자가 쓰면 욕 먹는다. 예쁜 데다 글까지 잘 쓰고 그림까지 잘 그려? 그렇다고 오리여인이 밉상임을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부엉이살림' 페이지를 열었다. 무슨 물건이든 쉬이 버리지 못해 초등학생 때 받은 편지가 선반에 있고 몇 년 전 영수증까지 지갑에 있다. 영화 티켓을 버리면 마치 추억과 감정까지 지워질까 해서 무던히도 모든 것을 붙잡고 산다. 공감하는 대목이지만 어떤 독자는 궁상이라고 할지 모른다. 공감해야지만 책 보는 진도를 나갈 수 있다.

36쪽에 이르면 여성다움이 물씬 느껴진다. 다림질을 참 좋아한다는 오리여인, 건조대에서 가져온 구깃구깃한 셔츠를 다리고, 여름철 습기를 가득 머금은 꿉꿉한 이불을 다리고, 나아가 잠옷까지 바삭하게 다린다. 이러면 모두 말짱한 새것이 되는 기분이란다. 이게 위로다.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를 섬유를 통해 받는다. 그래도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이유는 그녀의 다림질 때문이다. 그 수고로움에 ‘위로’라는 보상이 따르는 거다.

집에서 다림질만 하는 줄 알았는데 오리여인은 수다에도 능한 모양이다. 47쪽에선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정답인 것 마냥 재고 떠들고 온 날은 속이 후련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재고 떠든 길이만큼 늘어진 마음으로 돌아 온다’ 오리여인은 이 수다를 바로 후회한다. 48쪽에서 감정을 게워내 흘려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이어서 버려진, 그래도 과거엔 용도가 확실했을 소파 얘기로 넘어가는데 이 대목에서 감정의 소모라는 단어를 떠올린다면 꽤 통찰력 있는 독자라고 할만하다. 수다는 결국 감정의 소모다. 시 쓰는 재능이 있음을 53쪽에서 확인했다. ‘몸은 혼자 살아 편하다 싶어도 너무나 고요한 날은 어김없이 외로운 마음이 삐쭉 돋아난다. 그 끝에는 엄마의 밥도 걸려 있고 옛사랑도 피어 있다’. 엄마의 밥, 옛사랑이 외로움으로 대치된다. 다소 상투적이라 해도 엄마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외롭다. 딸이기에 더할 것이다.

오리여인의 남자친구를 볼까요. 순전히 기자 판단이다. 62쪽에 이르면 남자(일 것 같은) 사람과 술 한 잔 하고 싶다고 한다. ‘ 조용한 선술집에서(…) 늘어진 티셔츠에 몇 년은 끌고 다녔을 법한 슬리퍼를 신고(…)가장 중요한 하나(...)오랫동안 침묵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편한 내 사람과 말이다’ 여자 독자들에겐 낭만적 풍경이요 남성 독자들에겐 여자 친구와 폼잡고 싶은 감정이 들 것이다.

어쩌면 오리여인의 ‘편한 내 사람’은 아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76쪽을 펴면서 들었다. 아빠는 정원을 열심히 가꾸었지만 태풍에 다 날렸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예쁜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정성들여 심어가며 정원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오리여인은 아빠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가르침을 보여준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스승은 아빠만이 아니다. ‘엄마는 내게 마음에 풍파가 불면 그만큼 내면이 단단해진다 생각하라 했다.’(85쪽)
‘길을 걷다 어느 가게 앞에 적혀 있는 안내문을 보았다. ‘연중무휴’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갑자기 부모의 사랑과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당신들의 사랑은 연중무휴였다. 늘 내게.’(96쪽) 어느 부모 사랑이 연중무휴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가게 앞 안내문을 보고 부모 사랑을 건져 올리는 건 그만큼 오리여인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어지는 연애 얘기(145쪽에서 연애초보자라고 공개했다)는 알콩달콩 달달한 로맨스를 상상케하는 대목도 있고 조금은 아픈 대목도 있다.

오리여인은 한 꼭지마다 글 내용과 어울리는 우리말을 하나씩 넣었다. ‘연애초보자의 말’ 꼭지에선 손방(아주 할 줄 모르는 솜씨)라는 단어를 보여 주었고 ‘사랑이라는 건’ 꼭지에는 구쁘다(배 속이 허전하여 자꾸 먹고 싶다) 단어를 심어 놓았다. 센스가 돋보인다. 우리말 관련 책을 일년이나 읽었다고 한다. 우리말을 하나하나 배우는 건 이 책의 덤이다.

우리말 꽃이 피었습니다
오리여인 지음 │ 오리여인 그림 │시드페이퍼 펴냄 │ 280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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