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그 많던 모과, 누가 다 따갔나
[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그 많던 모과, 누가 다 따갔나
  • 독서신문
  • 승인 2016.10.2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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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이른 아침 아파트 정원을 산책할 때 일이다. 어느 노부부가 키가 큰 나무작대기를 들고 익지도 않은 모과나무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그 부부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엄밀히 말해 아파트 단지 내에 심어진 과실나무는 주민 모두의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도심지 아파트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는 것은 입주자들의 정서 함양과 아파트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돈을 들인 조경 사업이다.

이는 회색빛 군락에서 얻는 자연물의 혜택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삶에 쫓겨 삭막하고 메마른 가슴이 되다가도 매실나무 등 과실주가 풍성한 아파트의 원형 정원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푸른 숲속에 묻혀있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거실은 나로 하여금 무릉도원을 꿈꾸게 한다.

새 아파트를 팔고 이곳으로 흔쾌히 떠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운 좋게도 아파트 속에서 사계의 풍경을 감상하고, 오곡백과를 소유할 수 있는 전원형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복이라면 복이다. 가을의 아파트촌은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가 장식한다.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고 주황빛으로 익어가는 감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나의 인생철학도 함께 익어 간다는 착각에 빠진다. 빨간 대추와 모과는 더더욱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놈들은 이참의 결실을 위해서 봄부터 남몰래 자연과 싸웠을 터이다. 지난여름 혹독한 가뭄, 지옥염천, 세찬 비바람도 견디며 이겨내야 했다.

하지만 아파트촌의 인심이 마음을 긁는다. 모과의 향을 보자고 기다리던 인내도, 가지가 찢어지도록 올망졸망 익어가던 왕대추도 깡그리 따갔다. 또한 높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가지가 휘도록 주황빛 감을 달고 있던 감나무 나뭇가지가 밤사이 꺾어지기도 했다. 마치 나뭇잎처럼 땅에 내려앉을 때 형체가 으깨어진 감들을 보는 순간 콧등이 찡해왔다.

누군가 몰래 감을 따가며 저지른 일인 듯하다. 애처로운 맘이 들어 가까이 가서 확인해 봤다. 이 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부러진 가지의 감나무는 사람으로 치면 채 열 살도 안 넘어 보였다. 저런 몸체를 가지고 그 많은 잎과 감을 안고 비바람을 견디어 내었단 말인가. 모성애다. 저것이 바로 인간이 지닐법한 진한 모성애였다.

이 광경 앞에 선 나는 갑자기 손이 가슴으로 갔다. 자칫 노욕은 추하게 비칠 수가 있음을 스스로의 화두로 삼기 위해서이다. 한편 나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누군가의 지나친 욕심에 의한 이기심 발로 때문이었다. 가을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조경수의 과실들을 모조리 따가는 것도 모자라 나뭇가지를 꺾기까지 한단 말인가. 혼자만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1년을 기다리고 사는 이웃의 희망을 앗아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마저 인다.

봄이 출발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분명 성숙의 계절이다. 성숙은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이고, 철이 든다는 뜻이다. 이 가을 우리들은 익어가는 과일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깊은 사고력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 겸손함을 배우는 계절이 가을이기도 하다. 이 계절이 풍요로운 것은 결실이 있기에 가능하고, 낙엽을 바라보며 애수에 눈물짓는 것은 미완(未完)의 한이 있기에 그렇잖은가.

이참에 드높은 창공을 우러르며 이웃을 배려하고, 질서를 존중하며, 분수를 지키는 도덕을 배울까 한다.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방법도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열매를 바라보며 배워야 할까 보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루소는 ‘물질과 정신은 영원히 존재하는 원리’라고 했다. 그가 주장하는 이원론적 기저는 종당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표제어에 귀착한다.

감나무 아래에는 익은 감이 떨어져 있고. 대추나무 아래에는 익은 대추가. 밤나무 아래에는 밤이, 상수리나무 아래에는 상수리열매가, 백일홍 꽃밭 아래에는 백일홍 씨앗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 풍요로운 새해를 맞이하려면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가을 자연의 그런 경치를 소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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