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못 배워서
[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못 배워서
  • 독서신문
  • 승인 2016.08.16 09:4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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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식 <수필가 / 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지옥염천 계절이라 수시로 에어컨 바람에 유혹을 느낀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날씨니 하루 세끼 밥상 차리는 일이 고역이다.

반찬이 맛깔스럽다는 한식집을 큰 딸아이와 찾았다. 집안 찬거리가 부실하기도 했지만 모처럼 딸아이와 단둘이 찾는 외식이라 기분이 좋았다. 식당 안은 쾌적하리만치 시원한 바람이 살갗을 스친다. 더위에 절인 몸이 금세 식는다. 듣던 명성과는 달리 순수한 한정식당이 아닌 뷔페식이었다. 다행이다. 딸아이와 멀리 떨어져 지낸 시간이 꽤나 길었으니 식성도 변했을 터이다.

생각은 적중했다. 딸아이와 나는 먹거리를 담아오는 위치부터가 달랐다. 나는 육식 차림 쪽으로 발길이 가고 있는데 딸아이는 야채식, 이를테면 자연산 코너로 발길을 돌린다. 이렇듯 둘은 서로 식단이 확연히 달랐다.

음식은 그 나라 문화이며, 민족의 삶이라는 어느 수필가의 글귀가 문득 떠올랐다.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딸과 함께 호젓한 시간을 갖게 되어 무엇보다 기뻤다. 딸아이와 나는 음성을 낮춰 간단,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감자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지은 구수한 보리밥, 매콤한 열무김치, 우유와 귀리로 쑨 타락죽을 먹으며 행복이란 이런 자잘한 일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삼삼오오 손님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너 댓 명 여인들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네들은 앉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깔깔대며 식당 안이 울리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화제인즉 남의 험담이 주류였다.

“얘! 선영이 그 계집애 요즘 오뉴월 개 팔자라며?" 짧은 반바지에 헐렁한 감색 티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50대 중반 여인이 입을 연다. 그러자 곁에 앉아있던 흰색 원피스 차림의 같은 또래인 듯한 여인이 그 여인 말에 답을 받는다.“선영이 그 계집애, 나를 개털로 보더라. 며칠 전 백화점에서 마주쳤는데 못 본 척 하더라구” 그러자 등지고 앉아 뒤통수만 보이는 까만색 티셔츠 여인이 “선영이 그 애 진짜 개만도 못한 애다. 너랑 학교 다닐 때 얼마나 친했니?” 라고 한 마디 거든다. 그러자 그 곁에 앉은 역시 뒤태만 보이는 파란색 줄무늬 옷을 입은 여인은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식당 안이 떠나갈 듯 한바탕 웃더니,“너희들 생각나니? 학교 다닐 때 그 계집애, 우리들 앞에서 개 떨 듯 떠는 꼬락서니라니, 그러던 계집애가 부자 남편 만났다고 잘난 척 하는 꼴을 보노라니 비위가 상한다.”

이리 말하곤 또 무엇이 우스운지 “까르르!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린다.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머리가 허연 할머니 두 분이 그녀들 수다가 귀에 거슬리는지 혀를 끌끌 차며 한마디 한다.

“보아하니 젊은 나이도 아닌데 어쩌면 저리도 다른 사람 배려를 안 할까? 시끄러워서 음식을 제대로 못 먹겠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자 곁에 앉은 사십 중반 어느 남성이 한마디 거든다. “못 배워서 그럴 겁니다.” 무서운 훈육이었다.

이 말은 학력이 아니라 인격 결여를 뜻했을 터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공중도덕을 지키며 타인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과 언행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을 보면 기품 있어 보인다.

대기업 오너는 사원을 보는 데 나름대로 공식을 적용한다. 지식·기술·인품이 그것이다. 지식은 교육으로 얻어지고, 기술은 연마로 이뤄지는데, 인품은 스스로가 닦아야 한다. 그러니 제대로 된 인품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이렇듯, 저 중년 여인들에게는 인품이 모자란다. 언어 선택부터가 문제인 것이다. ‘개’라는 단어가 대화마다 끼어든다. ‘개털’, ‘개만도 못하다’, ‘개다리 떨 듯 한다’, 오뉴월 ‘개 팔자’. ‘개’자만 아니어도 그런대로 봐줄만한 데 말이다.

그런데 ‘옳지 못하다’는 뜻으로 흔히 ‘개’ 음절을 접두(接頭)하여 ‘개 눈’이니, ‘개 떡’, ‘개 죽 쑤었다’ 등 하여 어근(語根)의 뜻을 비하시키는 경우를 본다. 그 말 뿌리가 어디에서 왔을까? 개는 예로부터 배신을 모르는 의리의 동물 아닌가. 개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절대하지 않는다.

저 유명한 오수개(獒樹-) 이야기를 보자. 불이 난 줄을 모르고 잠든 주인을 구하고 스스로는 불에 타 죽었다는 동화 같은 얘기가 고려시대 최자(崔滋) 보한집(補閑集)에 나온다.

그러고 보면 개만도 못한 인면수심이 참 많다. 눈앞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 의와 정을 저버리는 행위가 배신(背信)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개가 되지 않으려거든 배신부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배신을 싫어했다. 그러한 조상이 우리 조상이거늘 언제부터인가 돌연변이 현상이 일어 이제는 조석으로 등을 돌리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 은혜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패륜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세상이 되었으니 살맛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 신문에 로또 1등에 당첨된 아들이, 당첨 소식을 듣고 찾아온 가족들을 ‘주거침입죄’로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 기사를 보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당첨금 40억을 받았으니 늙은 노모 쉴 제대로 된 거처 하나 마련해 달라는 청이 그리도 억울했던가? 물론 사연이야 있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이 일은 자식이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개가 사는 세상보다 못한 이 세상, 그야말로 자신은 똥을 깔고 앉아서 앞 사람 보고 땀내 난다고 하는 몰염치한 사람들, 이 병 어떻게 고치는 방법은 없는가. 주인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렸다는 오수의 개 이야기를 자꾸만 하고 싶어지는 이즈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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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형 2016-08-27 00:43:39
김혜식선생님의 "개탄"에 공감이 갑니다.
우리는 언제나 개보다 나은 인간이 될까요?
배신, 위선, 험담... 이런걸 개들은 안하지요?

이근형 2016-08-27 00:43:39
김혜식선생님의 "개탄"에 공감이 갑니다.
우리는 언제나 개보다 나은 인간이 될까요?
배신, 위선, 험담... 이런걸 개들은 안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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