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한국은 서둘렀다, 쉽게 타협했다, 역사가 복수한다- 『협상의 전략』
[서평] 한국은 서둘렀다, 쉽게 타협했다, 역사가 복수한다- 『협상의 전략』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6.07.18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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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인내는 힘이다. 저자의 말이다. 인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승자는 이를 기록한다. 패자는 늘 서두른다. 서두르기에 패자다. 자신의 패를 다 보여주니 역시 패자다. 저자는 다시 말한다. 특히 적에서 친구가 될 때에는 더욱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치유할 시간이 필요한 상처를 서둘러 봉합하면 반드시 곪는다.

역사는 증언하고 또 살아서 후손에 들려준다. 통일부장관 보좌관 출신 김연철이 『협상의 전략』이라는 묵직한 책을 냈다. 요즘 우리 국회도 협치라는 말(말로만)이 나오고 있는 터에 새삼 주목을 받을만한 노작이다. 협상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로 세계사에서 변곡점을 이루는 사건 20건을 조망한다. 그 변곡점의 순간마다 협상은 있었고 승자는 누구였는가를 책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 중엔 한국전 휴전협상, 한일회담이 있고 그 아픔은 후손들에게 뼈아픈 교훈으로 다가온다.

한국전 휴전협상 대목에 저자는 ‘총은 내려놓고 만나라’라는 제목을 달았다. 휴전협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도 전투는 끊이지 않았기에 너무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재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선 너무 서두른 것은 없나 살펴보자.

휴전회담이 처음 열린 곳이 개성 근방 99칸 한옥 내봉장이라는, 한때 개성 부잣집이라는 걸 아는 독자가 몇 될까. 결과적으로 UN군이 개성을 받아들인 것은 ‘실수’였다. 소련 중국 북한 측의 변경 제의에 따른 것이다. 개성은 UN군이 북진하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을 중립지역으로 만들면 UN군 진격을 막는 효과가 있었다.

개성은 38도선 이남이었지만 당시는 공산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회담장소가 판문점으로 변경되고 이후 판문점을 중심으로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판문점 북쪽의 개성은 자연스럽게 북한 영토가 됐다.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개성은 공단의 형태로 남쪽에 개방됐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공산군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결정되면 전투를 중단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UN군은 ‘전투 계속 원칙’을 고집했다. 비극의 씨앗이다.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이용해 공산군을 압박하는 것이 협상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국내 온건파와 강경파의 입장을 절충해 “휴전회담은 하되 군사작전은 계속한다”로 방향을 정했다. 미국은 비기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결국 이 협상 기간 동안 UN군 사상자는 6만명, 공산군 사상자는 23만명에 달했다. 어쨌든 1953년 7월 27일 휴전됐다.

휴전회담을 시작한 지 2년 18일째 되는 날이었다. 화약 냄새가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전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됐을 뿐이다. 한반도는 휴전과 종전 사이에서 혹은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승자도 없고 패배도 시인하지 않는 ‘비기기 위한 협상’이 남긴 상처는 아직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다.

역사가 한국 편을 들지 않은 것은 또 있다. 한일협정이다. 저자는 단언한다. 한국으로선 잘못 끼운 첫 단추였고, 한국은 너무 서둘렀다고. 먼저 잘못 끼운 첫 단추는 뭘 두고 하는 말인가. 바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다. 1951년 9월 4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 51개국 대표가 모였다. 나흘 뒤 일본과 48개국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한국은 초대받지 못한 조약이었다. 미국이 한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전을 치르느라 외교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후 한일협정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이런 아쉬움은 더욱 크게 남는다.

당시 일본에는 아주 훌륭한 미국인 ‘우군’이 있었고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이게 일차적인 불운이라면 불운이다. 일본의 우군은 시볼드라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정치고문단 특별보좌역이다. 시볼드는 주일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을 지내고 부인은 일본계 영국인이며 나중 장인이 운영하는 일본 법률회사를 맡기도 한다.

시볼드는 ‘노랑머리 일본인’이나 다름없었다. 사사건건 일본 입장을 대변했다. 어쨌든 한일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열리는 1951년 10월 20일, 한국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회담장인 일본으로 갔다. 대표단은 준비회의커녕 출발 전날 서로 인사만 했을 정도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국 수석대표로 주미대사 양유찬을 지명하는데 양유찬은 일본말을 모르고 영어만 할 줄 알았다. 한일협정은 세월이 흘러 박정희 정권의 몫이 됐다. 경제개발에 목을 대고 있던 박정희는 배상금액도 다른 동남아 나라에 비해 적었고 명분도 잃은 가운데 합의를 하고 만다. 이 와중에 개인청구권 조항이 사라졌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아직까지 조선인 원폭 피해자, 징병 징용 피해자,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보상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독도 문제. 역시 시볼드가 문제아였다(우리가 보기엔). 그는 독도는 일본의 오랜 주장이고 타당성이 있다고 건의, 결국 독도가 우리가 일본으로 돌려받아야 할 영토 이름에서 슬그머니 빠졌고 우리는 이 사실도 알지 못했다.

 
준비가 허술한 건 또 있다. 1951년 7월 양유찬은 미국 측에 평화조약 초안에 한국 영토에 독도와 파랑도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물었다. 두 섬의 위치를. 한국 직원들은 두 섬 다 울릉도 근처라고 했다.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파랑도는 전설의 섬 ‘이어도’다. 1984년 처음 실체가 확인됐다. 이승만 정부는 위치도 모르는 섬(파랑도)의 귀속을 주장한 셈이다. 우리 영토 주장은 국제 신뢰를 잃었다.

둘째 서두른 것은 눈앞의 이익만 좇은 정부의 무책임이다. 배상문제 독도문제 등 역사문제를 후대에 떠넘겼다. 후대로 밀어내며 어설프게 봉합한 것이다. 이 봉합된 역사는 망언이라는 옷을 입고 역사 인식 문제로, 혹은 독도 영토문제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매듭짓지 못한 역사는 예기치 않은 시점에 훨씬 악화된 형태로 삐져나와 반드시 복수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저자의 말이 가슴에 맺힌다.

우리 현대사의 굴곡은 협상 능력 부재의 소산이다. 번듯한 길을 두고 자갈길을 걷는 무능함을 보이고 있다. 손잡아 주는 이 없는 엄혹한 국제질서에, 지금은 준비가 돼 있는가. 아직도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그리고 정치판에서 ‘협상’이 있다는 아름다운 소식을 별로 들을 수 없다.

미국 존 F 케네디의 쿠바 봉쇄는 놀라운 협상과 리더십의 결과로 칭송받지만, 케네디도 피그만 상륙 실패라는 처참한 결과에 대한 철저하고도 겸허한 학습을 통해 얻은 결과다. 우리에게 케네디가 없다고만 할 것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협상을 두려워 말고 준비해야 한다. 저자의 뜻도 여기에 있다.

■ 협상의 전략 - 세계를 바꾼 협상의 힘
김연철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 768쪽 │ 3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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