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소나기·동백꽃 등 ‘감동의 문장’ 찾아 떠난 18번의 유람기
[서평] 소나기·동백꽃 등 ‘감동의 문장’ 찾아 떠난 18번의 유람기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6.07.14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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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이 『작가의 집으로』
 

[독서신문 이정윤 기자]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둥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움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어릴 적 교과서로 접했던 김유정 소설 『동백꽃』의 한 구절이다. 1930년대 강원도 산골 마을에 사는 열일곱 동갑 남녀의 순박한 사랑을 유머러스하게 다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육두문자를 써가며 다소 과격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던 점순이, 그리고 그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감했던 ‘나’의 모습에 미소를 짓곤 했다.

반면, 김유정은 안타까운 삶을 살았다. 1908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간 그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었고, 실연과 학교 제적 등 굴곡을 겪었다. 춘천으로 귀향한 그는 학교가 없는 실레마을에 금병의숙을 지어 야학을 하는 등 농촌계몽활동을 벌였다. 1930년대 궁핍한 농촌 현실을 체험한 것도 그때였다.

몇 년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농촌 사람들의 삶을 희화적인 소설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등단 이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에 처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병석에서 무리한 탓에 1937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픈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들려준 소설의 단면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 작가가 강진의 김영랑 시인 생가를 찾아 먹으로 그려낸 모란.

이제 그를 만나려면 춘천의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가야 한다. 『작가의 집으로』 저자 이진이처럼. 저자는 만날 수 없는 작가가 그리워 2012년 10월부터 2016년 6월까지 마흔세 곳을 유람했다. 동시대를 공유한 여덟 명의 시인(윤동주, 박인환, 정지용 등)과 여섯 명의 소설가(채만식, 이효석, 이청준 등), 그리고 네 명의 해외 작가(하이타니 겐지로, 헤르만 헤세 등)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책에는 열여덟 번의 유람기가 담겨 있으니 실제로 만난 작가는 더 많다.)

김유정의 흔적을 찾으려 했던 그의 소감은 이렇다. “김유정 문학촌에서 농익은 봄을 만났다. 춘천은 알싸한 나무와 향긋한 야생화의 향내가 늦게까지 뿜어 나오는 곳이다. 점순이와 키를 재보고, ‘나’ 몰래 닭싸움을 시키며 봄을 만났고, 작별했다. 운 좋게 봄비를 만났다. 마른 땅에 봄비가 스며들면, 이윽고 새로운 풍광이 펼쳐질 것이다. 변덕이 심한 봄을 그만 떠나보내기로 했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미대생의 문장에서 어설픈 문향을 느끼라는데, 문학을 전공한 미대생의 문학적 감성이 느껴진다.

저자는 지하철과 시외버스, KTX, 가끔은 배에도 올랐다. 문학관과 생가에 깃든 작가의 흔적을 찾다 보면 초상의 눈빛에 어린 우수, 유품과 친필원고에 묻은 손때가 느껴졌다. 그리고 작품 배경에 찾아가 중심인물을 만나기도 하고, 작가의 눈을 빌려 바라본 정경에서 주인공이 돼 울고 웃었다.

엉덩이가 무거웠던 고3 시절, 문학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던 소녀 시절의 감성이 아직도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 같다. 책을 통해 ‘쉽게 쓰여진 시’가 쓰인 1942년 일본으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 읊어진 강진의 돌담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풍부한 감성이 있어야만,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 양평 황순원 문학촌에서 40분 거리의 두물머리. 남한강과 북한강, 큰 물줄기 둘이 머리를 맞대고 있어 두물머리라 한다. <사진제공 = 홍시>

감수성 풍부한 저자의 발길을 따라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로 떠나보자. 그는 소나기가 제법 어울리는 6월 초여름 아침, 하늘하늘한 원단의 푸른 원피스를 입고 텅 빈 열차 한 칸에 앉아 책 『소나기』를 펼쳤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 양수역에 내리니 마을은 한적함으로 가득했다. 눈앞에 보이는 산책로는 징검다리와 들꽃마을, 송아지들판 등 소설의 배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소나기마을 정류장에서 40분 거리에는 두물머리가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 큰 물줄기 둘이 머리를 맞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과거에는 서울로 오가던 사람들이 이곳 주막에서 목을 축였고, 말에 죽을 먹이며 잠시 쉬어갔다. 안개가 그윽하게 낀 두물머리는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다.

황순원은 『소나기』의 한 대목에 양평의 풍경을 그려 놓았다. “산마루께로 올라갔다. 맞은편 골짜기에 오순도순 초가집이 몇 모여 있었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유달리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따가운 가을 햇살만이 말라가는 풀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저자가 양평을 방문한 그 날은 여행 전날 내린 세찬 비로 공기가 촉촉하고 두물머리에서는 선선한 강바람이 불었다.

단 두 편의 유람기를 소개했으나 책에는 열여섯 번의 또 다른 유람기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충청북도 옥천의 정지용 시인, 봉평 메밀밭의 이효석 작가, 독일 남부 소도시 칼프의 헤르만 헤세 등 다양하다. 마흔세 편의 글 중 일부를 추려 『작가의 집으로』로 엮었으니 2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우선 한 권의 책을 매듭지었으니 마흔네 번째 여행을 떠났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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