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안개 속으로 걸어간’ 시인,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다
[리뷰] ‘안개 속으로 걸어간’ 시인,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다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6.06.16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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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림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독서신문 이정윤 기자] “밤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꿈꿀 수 없듯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말을 얻을 수 없다. ……. 내가 지금, 왜 침묵을 말하고 있느냐 하면, 침묵처럼 무섭고 슬프게 살다 간, 한 시인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를 몇 편 보내 당선의 영예를 안았을 뿐, 그 이후 어떤 곳에도 작품 한편 발표하지 않았으며, 시인이라는 관사를 쓰고 어느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홀로 남양주의 작은 아파트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골목을 배회하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그가 여림이었다.”

스승은 제자를 이렇게 기억했고, 제자인 시인 여림(본명 여영진)은 스승 최하림의 이름 끝자를 빌려 필명을 ‘여림’이라 지었다. 스승은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제자는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그리고 2010년과 2002년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은 2016년에도 우리 곁에 남아있다. 최하림 시 ‘봄’의 한 구절 “봄이 부서질까봐 조심조심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는 광화문 글판으로, 여림이 남긴 110여편의 시는 유고 전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로 우리를 찾아왔다.

▲ 2002년 세상을 떠난 시인 여림. 스승 최하림의 이름 끝자를 따 필명을 만들었다. <사진제공 = 최측의농간>

출판사 최측의농간이 10개월간의 기획을 거쳐 펴낸 이 유고시집은 의미가 남다르다. 먼저, 1부 ‘시’의 전반부는 2003년 세상에 나온 여림의 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가 채우고, 후반부는 시집에 실리지 못한 44편의 유작 시편들이 배치돼 있다. 2부 ‘산문’에는 신춘문예 당선소감, 수필, 시작 메모, 편지를 비롯해 최하림, 박형준, 이승희 시인의 발문이 담겨 있다.

그중 미완성의 시 한 편이 유고 전집의 첫 장을 장식한다. 책의 제목인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이다. 편집자는 ‘여림 전집’이라는 군더더기 없는 제목만으로 책을 선보이려 했으나, ‘여림’이라는 시인의 이름이 낯선 독자들에게까지 울림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하나의 시를 택했다. 고심 끝에 선정된 이 시는 시인의 상처와 사랑의 기록들을 짧은 단락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루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하나를 나는 생각했었다.”

여림은 그런 인물이었다. 등단 후에도 자신의 시들이 묶여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시인이 되고자 서울에 왔으나, 역설적으로 시를 떠나고자 서울을 탈출했을 때 세상은 그가 시인임을 알아주었다. 그는 이제 ‘안개 속으로 걸어간’ 시인 여림에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시인 여림으로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여림 지음 | 최측의농간 펴냄 | 240쪽 | 11,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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