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이 즐거워야 좋은 산행이 된다
하산이 즐거워야 좋은 산행이 된다
  • 독서신문
  • 승인 2015.09.1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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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향기'
▲ 황태영 희여골 대표

[독서신문] 초입에 높게 뻗은 큰 나무숲이 있는 등산로들이 있다. 울창함에 탄성을 지르며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크게 자란 나무들은 보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산 전체를 지배할 것 같았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산위로 번식해 가는 데는 실패한다. 최정상에는 곧게 자란 큰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휘어졌거나 작은 나무들 밖에 없다.

세찬 바람과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자면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자신을 구부리거나 최대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가장 높은 곳에는 최악의 조건에서 생존지혜를 깨우친 겸허한 나무들만이 자라고 있다. 그들은 힘자랑하는 큰 나무들을 발꿈치 저 아래에 두고 지긋이 굽어보고 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초년기에 삶을 좌우 할 것 같았던 거창한 지표들이 중년을 넘기고 나면 그저 다 부질없어 보인다. 노년에 접어들 즈음이면 거창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변함없는 사람, 편안한 사람이 더욱 높아 보이고 소중해진다.

우리는 삶 자체가 모두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다. 성적도 지위도 재산도 늘 오르고 많아져야만 한다. 게임하듯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쟁하듯 정상에만 오르려고 한다. 그러나 오르는 것 보다는 오른 이후가 더 중요하다. 산 정상에서의 식사는 늘 즐겁다. 네 것, 내 것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 짐이 되니 아낌없이 나누고 다 소비한다.

아무리 산행을 좋아해도 정상에 머무르는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 또 영원히 정상에 머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나눌 수 있을 때 나누고 감쌀 수 있을 때 감싸야 한다. 인생의 묘미는 오히려 내려가는 데에 있다. 혼자서 헐떡이며 가는 무료함이 아니라 담소를 나누며 주위의 꽃과 나무를 즐길 수 있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잘남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유람하는 여유가 있다.

일본에서도 재벌로 통하는 우리나라 모 그룹 회장께서 일본의 국세청장과 바둑친구로 오랜 교분을 나눈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 회장께서 국세청장 집에 바둑을 두러 갔다. 집은 20여 평도 채 안 돼 보였고 손때 묻은 가구 등 살림살이는 몇 십 년이 다 돼 보였다. 한참 바둑을 두다가 보니 그의 부인이 손으로 빨래를 빨고 있었다. 세탁기가 없었던 것이다. 회장은 명색이 국세청장의 부인인데 재래식 세탁하는 것이 민망도 하고 또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해서 별 생각 없이 세탁기 한 대를 보내 주었다. 그러자 국세청장은 회장을 보자고 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나와 수십 년 된 친구이기 때문에 나를 정확하게 아는 줄 알았더니 매우 섭섭하다. 당신은 큰 부자라 많은 재산과 종업원을 거느리고 만족하게 살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은 없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만족하게 살고 있다. 나는 스무 평도 안 되는 집에서 내 안사람이 세탁기도 없이 손으로 빨래를 하면서 살지만 우리 국민 모두에게서 절을 받고 있다. 나는 국민의 절을 당당하게 받으면서 산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안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깨끗하고 올바르게 처리한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박봉에도 행복하다. 나의 목표는 돈이 아니라 청렴함으로 국민들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내 목표대로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이런 선물은 거두어 가기 바란다.”

은퇴를 하게 되면 심한 공황상태나 우울증을 겪는다. 돈이나 지위의 잣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삶의 목표를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없는 것에서 찾는다면 충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면 가족과 지인들이 국세청장의 아내처럼 그 목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 소박하고 편한 벗들이 있으면 내려가는 발걸음이 한층 가볍고 즐겁다. 오를 때의 피로를 내려갈 때 잘 풀어야 좋은 산행이 된다. 정상정복은 산행의 끝이 아니라 산행을 즐겁게 마무리 하는 또 다른 시작이다. 은퇴도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마무리하는 새로운 시작이다. 내려가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설렘이 되어야한다. 즐거운 하산이 삶을 빛나고 아름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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