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 독서신문
  • 승인 2015.06.16 17: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월간 문학> 6월호 성승철의 시 「무릎에게 미안하다」를 읽고

▲ 김혜식 수필가
'삼종지의'가 강요되는 시대도 아니련만 현모양처 기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다. 몸이 아파도 가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그런 마음 때문이다. 독감으로 한 달여를 밤마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자나 깨나 집안일로 노심초사했다.

어디 집안 일 뿐이랴.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로 온몸이 달구어져도 어미로서 자식 걱정 때문에 몸져눕지도 못한다. 막내딸 경찰공무원 시험 때문에 아이 앞에선 아픈 내색도 못했다. 또 있다. 평소 척추골절로 편찮으신 친정어머니 앞에선 촌보를 못 옮길 정도로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겪어도 얼굴 한번 못 찡그린다. 남편이 단잠 깰까봐 밤새 고열과 식은땀이 나도 앓는 소리도 못 내고 혼자서 뒤척인다. 나의 삶은 '재채기만 나와도 병원을 찾는다'는 친구와는 정반대다.

평소 '감기쯤이야' 하고 만병의 근원이라는 이 병을 얕잡아본 게 화근이다. 견디다 못해 종합병원을 찾았더니 "왜 몸이 이 지경까지 되도록 방치했느냐"는 의사의 호통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의술에 무지한 나로선 증세가 감기와 똑같으니 감기로 여겨 동네에서 한 달이라는 긴 시일 동안 열심히 감기약만 처방 받아 복용했을 뿐이다. 기침, 목감기는 약간 호전됐으나 열이 심한 후유증을 얻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나의 성격도 많은 작용을 한 게 사실이다. '아무리 몸과 마음이 아파도 남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말라'는 어려서부터의 밥상머리 어머니 교육 때문이다. 어머니의 교육이 골수에 맺혀 감기 증세에서도 특유의 강인함으로 버티려 안간힘을 쓰게 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그때도 요즘처럼 고열과 심한 기침 증세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오르고 아팠다. 그러나 어머니 앞에서 아프다는 소리를 못했다. 참고 학교를 갔으나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도 조회 시간에 운동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고열로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몸을 이끌고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수강생들 앞에 서는 것이 예사일처럼 되어버린 지 한 달째다. 의연한 모습으로 강의를 하곤 했으니 수강생들이 나의 아픔을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이젠 한계점에 도달했나보다. 강인한 성격도 병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밤마다 고열과 식은땀으로 옷과 이불 적시기를 한 달여, 이젠 더 이상 미련스럽게 건재함을 과시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월간 문학』 6월호 성승철의 시 「무릎에게 미안하다」라는 시를 읽었다. 큰 감명을 준 시였기에 되새겨 본다.

'50이 넘도록 생의 무게를/ 노예처럼 지고 다니던 나의 무릎이 쓰러졌다/ 일터에 장기 병가를 썼다가 적잖이 손해도 봤다/ 그 일로 무릎은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러지 말라고 달래고 풀어주어도/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학창 시절 닭싸움이나 달리기 시합에서/ 선두를 놓치지 않던 나의 무릎/ 한 해 학용품도 모두 그가 책임 졌다/ 처음 어머니가 그를 나에게 보낼 때/ 나름 세상 제일이 되고자 맹세도 했을 것이다/ 애들이 생기고 세상이 더 험해질수록/ 한 때 내가 이 사회의 튼튼한 무릎이 되고자 입술을 깨물 때마다/ 그의 맹세도 더 뜨겁고 붉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갈 곳 안갈 곳 구분 못하고 날뛰었던 것이다' <하략>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게 된 순간부터 무릎은 지대한 역할을 해온 게 사실이다. 무릎은 인간을 꼿꼿하게 버티게 하는 일은 물론 계단을 오르내리게 하는 신통술도 갖고 있다. 이뿐인가. 성공을 향해 힘차게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 있다. 무릎을 성공과 실패, 굴욕과 항복에 빗대어 쓴 말이다. 성승철 시인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이젠 자신의 무릎이 작동 불능이라고 토로했다.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로 가족을 위해 무릎이 닳도록 살았다. 이제 내 무릎 내가 소중히 간수해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 수필가, 청주 드림작은도서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