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나무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치유를 준다
<87> 나무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치유를 준다
  • 독서신문
  • 승인 2015.06.1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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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영의 풀 향기

▲ 황태영 수필가

[독서신문] 옳은 소리를 하고 가르치려는 시보다는 그냥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시가 좋다. 옳은 소리 속에는 독선이 있고 가르치려는 것 속에는 오만이 있다. 시는 그런 것을 벗어났을 때 더 아름다워지고 즐거움과 위로, 치유와 평화를 준다. 말없이 편한 친구가 되어 상처를 감싸주는 나무는 그 자체가 한편의 시다. 요란하고 잘난 것 보다는 조용한 그리움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나무는 그냥 편하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입으로 하는 말보다 가슴으로 하는 말이 울림이 크다.

미국에서 평범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성장기의 대부분을 어머니와 단둘이서 줄곧 살아왔다. 어머니에게는 그녀가 곧 삶의 전부였고 목숨과도 같았다. 직장을 다닐 때 그녀는 약한 몸을 단련하기 위해 인도 명상센터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동양의 예술과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인도 불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무언가를 느껴가며 점점 알 수 없는 힘에 끌려가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인도로 가서 출가할 결심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청천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평생을 딸만을 믿고 의지해 왔다. 딸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극심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큰 끌림을 뿌리칠 수 없어 인도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어머니는 위로 받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30여년을 더 사셨다. 딸을 몹시도 보고 싶었지만 모녀가 만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대략 10년에 한번 꼴로 단 세 번뿐이었다. 그것도 어머니를 뵈러 간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행해진 인도불교의 공식적 행사에서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나중에 지인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전해 주었다. "내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도 나는 내 딸의 어머니가 되고 싶다. 내 딸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살고자 했다. 자신도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래도 고뇌하며 얻고자 했던 그 심오한 뜻을 다시는 미련하게 방해하고 싶지 않다.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내 딸의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고 싶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내 딸의 어머니가 되어 딸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다." 애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은 자신을 버리고 냉정하게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찾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절절한 회한과 그리움에 몸부림쳤지만 끝내 딸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서운함도 원망도 없다. 오히려 딸의 인생을 가볍게 보내주지 못하고 잠시나마 방해가 되었던 것이 죽을 때까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자주 만나고 자주 말해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자주 만나고 자주 말하지 않는다고 사랑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르치며 내 방식을 강요하는 사랑보다 나무처럼 그냥 곁에 있어주는 사랑이 오히려 크고 깊다. 30년을 못 만났지만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볼 수는 없었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고 자랑이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재단하고 자신의 인생 속에 가두려는 것보다 때로는 묵묵히 지켜보고 곁에 있어주기만 하는 것이 더 큰 위안이자 치유가 되기도 한다.

깊은 사랑은 말할 수도 볼 수도 드러낼 수도 없다. 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 최고의 담백함을 가진 물은 별도의 감미료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는다. 좋은 그림은 화려하지 않다. 최고의 미를 가진 그림은 현란한 색상으로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히려하지 않는다. 무색(無色), 무미(無味)의 담담(淡淡)함에 극상의 아름다움이 녹아든다. 자랑하고 드러내지 않기에 격이 있고 향이 깊다. '가금용도 진금부도(假金用鍍 眞金不鍍)'. 가짜 금에는 도금을 하지만 진짜 금에는 도금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도금을 해도 빛이 나지 않는 것이 있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것이 있다. 진실한 것은 꾸미거나 덧칠할 필요가 없다. 요란스레 만나고 말로 채색하지 않아도 늘 그립고 변함이 없다. 진실한 사랑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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