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제의 '닭으로 본 인문학' _ (39) 남녀의 첫 만남과 통닭 이야기
백민제의 '닭으로 본 인문학' _ (39) 남녀의 첫 만남과 통닭 이야기
  • 이보미 기자
  • 승인 2015.04.23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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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민제 칼럼니스트
중년 부부가 테이블에 앉았다. 남성은 50대 중반, 여성은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으로 보인다. 아주 살가워 보였다. 인상으로 보아 큰 고생을 안 하고, 비교적 편안한 삶을 꾸린 듯했다. 부부는 수뿌레 닭갈비 메뉴를 골고루 시켰다.

숯불 간장 삼겹살, 숯불 소금 닭갈비, 숯불 양념 닭갈비 등이다. 특이하게 모든 메뉴를 2인분 씩 주문했다. 소주도 2병을 시켰다. 은근히 호기심이 일었다. 두 사람이 먹기에는 주문 양이 너무 많았다. 여섯 명이 즐길 분량이다. 가게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테이블에는 부부만 남았다.

마침 남성이 묻는다. "새로운 게 많네요. 원래는 통닭 치킨만 있었고, 그 뒤로 불닭 등 여러 상품이 나왔죠. 그런데 이 같은 메뉴는 보지 못 했어요." 대화의 물꼬를 튼 남성은 닭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필자가 거들었다. "닭에 대해 사연이 많은가 봐요." 그 때 잠자코 듣던 여성이 답한다. "저도 한 마디만 해도 되죠? 사장님." 여성이 남성을 힐끗 쳐다본다. "치킨 때문에 이 남자, 평생 저에게 바가지 긁혀요."

말문이 트인 여성은 사연을 풀어 놓았다. 평생 바가지 긁히는 남성과 통닭 이야기를 지상 중계한다.

제가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어요. 소개팅도 많이 들어왔죠. 하루는 직장 선배가 '정말 괜찮은 남자, 남 주기 아까운 남자'라면서 만나 보라는 거예요. 커피숍에서 만나 가벼운 탐색전을 했습니다. 선배의 말이 영향을 미쳤는지, 호감이 갔어요. 식사 하기는 애매한 시간이었고, 처음 만나 영화 보러 가는 것도 마땅치 않았어요. 마침 통닭집이 보였어요. 저희는 가게에 들어갔어요. 양념 닭에 맥주를 시켰어요.

그러나 처음 본 남자 앞에서 맥주를 들이킬 수는 없었죠. 한 잔만 마시고 닭을 뜯었어요. 남자는 맥주를 두 세 잔 마시더군요. 저는 닭을 좋아했죠. 다 먹고 싶었으나 내숭을 떨었죠. 두어 번 먹은 뒤 포크를 내려놓았어요. 이 사람도 몇 점 들더니 제 행동을 따라 하더군요. 닭을 싸 가고 싶었어요. 처음 만난 사이, 더욱이 저는 남편에게 첫 눈에 반했어요. 고상한 척 해야 했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차마 싸 달라고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이거 싸 주세요"라고 하더군요.

 
'이 남자가 내 식성을 파악했군. 게다가 체면 차리는 것까지 알았군'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정도 눈치에 거리낌 없는 행동이면 합격'이라고 속으로 소리쳤죠. 사장님이 절반 이상 남은 닭을 포장해 흰 봉투에 담아 주었습니다. 남편이 받고 잠시 주춤하더군요. '아, 이 남자가 들어다 주려는가 보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너도 참 좋아 보였습니다. 남편은 가게에서 나온 뒤 헤어질 때가 됐는데 통닭을 줄 생각을 안 하더군요.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남자가 한 마디 했습니다. "000씨는 통닭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통닭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남은 것 싸 달라고 했어요." 아니, 뭐야. 저를 생각한 게 아니라 자기만 생각했던 행동이었습니다. 사귄 적도 없지만 배신감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죠. "네, 저는 치킨을 안 좋아해요. 000씨 많이 드세요." 마음에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약속도 없이 헤어졌습니다. 저는 황당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닭을 못 받았고, 더 당연한 애프터 신청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선배의 적극 권유로 만남을 가졌고, 혼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서운함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닭 집에 가면 꼭 저희는 각자 주문합니다. 두 사람이 있기에 2인분을 주문한 게 아닙니다. 각자의 몫을 주문해서 2인분입니다. 메뉴를 하나씩 시켜도 되는 데, 모든 종류를 두 개씩 주문한 것은 남편 때문입니다.

남편은 첫 만남에서 아내를 배려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배려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아내도 이 말을 바늘로 가볍게 찌르는 애교로 한 듯하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이라도 "통닭 가져가세요"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아내가 지금까지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 글쓴이 백민제는?
맛 칼럼니스트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0년의 직장생활을 한 뒤 10여 년 동안 음식 맛을 연구했다. 특히 건강과 맛을 고려한 닭고기 미식 탐험을 했다. 앞으로 10여년은 닭 칼럼니스트로 살 생각이다. 그의 대표적 아이디어는 무항생제 닭을 참나무 숯으로 굽는 '수뿌레 닭갈비'다. www.supu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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