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악기는 빈 공간이 있기에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가 있다
<85> 악기는 빈 공간이 있기에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가 있다
  • 독서신문
  • 승인 2015.04.2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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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영의 풀 향기

▲ 황태영 수필가

[독서신문] 겨울은 재도약을 위한 소중한 휴식이다. 한파로 낡은 것을 떨쳐내고 새로운 것을 길러내기 위한 재충전의 힘을 비축한다. 겨울의 휴식이 없다면 봄의 활력도 없다. 깊은 산 속에서 노인과 건장한 청년이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청년은 노인보다 더 많은 나무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땀도 닦지 않고 열심히 도끼질을 했다. 그러나 노인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쉬엄쉬엄 일을 했다. 땀이 흐르면 수건으로 닦고 숨이 차면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무뎌진 도끼날을 갈았다. 집에 돌아가야 할 무렵 그동안 쌓아 놓은 장작더미를 보던 청년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장작이 훨씬 많으리라 생각는데 노인의 것에 비해 겨우 절반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청년이 물었다. "제가 더 열심히 일했는데 어떻게 제 장작이 더 적은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일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휴식이나 도끼날을 가는 재충전의 시간이 꼭 필요한 법이라네."

우리는 돈과 출세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린다. 청년이 도끼를 갈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잠시 좌우를 돌아볼 겨를도 없다. 한번 경쟁에서 뒤지면 그것으로 인생이 끝날 것처럼 조급증을 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분들은 누구하나 예외 없이 한번쯤은 뒤쳐지기도 했고 좌절도 겪었다. 자동차 타이어가 모래 속에 파묻혔을 때는 타이어의 바람을 조금만 빼면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다. 조그만 물러남, 작은 휴식이 큰 전진, 높은 도약의 밑거름이 된다.

과거 우리에게 UN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는 그저 꿈에서나 상상해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반기문 총장도 늘 승승장구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예외 없이 '커다란 시련'이 있었다. 2001년 2월 그가 외교부 차관이었을 때, 한·러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미국 입장과는 달리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에 미국이 반발하며 외교 갈등이 빚어졌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오해를 풀기 위해 당시 차관이었던 반 총장은 해임되었다. 평생을 바친 외교관 생활이 '불미스러운 퇴진'으로 끝났다. 이때를 그는 "31년간 공직생활을 했지만 허무하게 백수가 됐고,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4개월 뒤 한승수 외무부 장관이 UN 총회 의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의장 비서실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보통 국장급이 가는 자리라 차관을 지냈던 반 총장으로서는 한 직급이 낮은 자리였다. 그러나 반 총장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UN 총회 의장 비서실장의 경험과 당시 만났던 사람들이 그가 UN 사무총장 선거전에서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어 주었다. 남들에게 초라해보이는 것이 싫어 그 때 UN으로 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었다면, 그는 UN 사무총장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성공한 사람들은 반드시 좌절과 실패를 경험한다. 겨울의 앙상한 나무도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원색의 화려함으로 변한다. 잠시만 쉬면 인생에서 낙오되는 것처럼 걱정들을 하지만 불명예 퇴진이나 강등도 더 큰 도약을 위한 재충전의 휴식 과정에 불과하다. '무엇을 잡을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놓을 것인가'를 숙고하며 고요히 쉬는 시간을 가져보아야 한다. 지친 새는 멀리 날 수가 없다. 쉼을 통해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쉼을 통해 새로운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차는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무딘 도끼로 앞만 보며 나무를 찍기보다는 도끼날을 가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악기는 빈 공간이 있기에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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