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며느리가 준비하는 차간사르, 몽골의 설 차림
한국인 며느리가 준비하는 차간사르, 몽골의 설 차림
  • 독서신문
  • 승인 2015.02.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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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빛’ 몽골 이야기 _ <1> 몽골의 설
 

[독서신문] 우루항가이 아이막(몽골 최대 행정단위, 한국의 도에 해당)에서 보낸 설 차림소가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부엌으로 갔더니 하얀 점이 담뿍담뿍 박힌 얼룩소 한 마리가착하게 눈을 감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잡은 소의 털가죽으로 고기 덩어리들을 싸고 그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형상이 얼핏 그렇게 보였다.

학생들을 불러다가 소의 영혼을 천도하는 경전을 읽히고 기도를 했다. “고마운 얼룩소야. 우리가 너를 먹고 좋은 일을 많이 할 테니까 너는 얼른 사람 몸으로 다시 태어나거라.” 그리고는 칼과 도끼를 동원해서 뼈와 살을 분리하고 장작불을 피워 내장을 끓이면서 우리 집도 본격적으로 차간사르, 설 차림을 시작한다.

▲ 몽골의 전통 설 차림. 밀가루 과자 히윙붜우와 양고기를 삶은 오츠가 보인다. 세배객들은 만두를 찌고 더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마유주나 우유차를 마시며 덕담을 나눈다.

차간사르는 정월과 설을 의미한다. 가족, 친구, 동료들이 무리를 지어 전통 옷인 델을 차려 입고 세배를 다닌다. 세배객이 들어서면 주인 식구들은 모자를 갖추어 쓰고 반갑게 맞아 두 팔을 마주잡고 뺨을 맞대며 인사를 나누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덕담을 나누고, 시를 암송하기도 한다. 흥이 나면 민속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여러 가지 민속놀이와 내기들을 한다. 차간사르 동안은 누구든지 실컷 먹고 마시며 즐겁게 노는 것이다.

우리 집은 몽골에서는 많이 알려진 스님 댁이라 정월 한 달 동안 세배객이 300명 이상 온다. 모든 세배객에게 반드시 선물을 주는 것이 풍습이라 엄청나게 많은 선물과 먹거리를 준비한다. 일년 내내 사탕이며 각종 유제품과 선물이 될만한 새 물건들을 모아두고 시장도 미리미리 봐둬야 한다. 차간사르가 바짝 다가오면 시장은 큰 북새통이 되어 나같이 몸이 부실한 한국인이 잘못 끼어들면 뼈가 굵고 우악한 몽골사람들 틈에서 으깨질 위험이 실제로 있다.

설 차림은 소고기를 잘게 썰어 보츠라는 고기만두를 빚는 것이 제일 큰 일이다. 한 집에 2,000~3,000개씩 빚는데 한국의 김장 품앗이처럼 순번을 정해 이 집 저 집으로 몰려다니며 만든다. 몽골사람이라면 코흘리개 아이라도 말을 탈줄 알고 만두를 빚을 줄 안다. 깊어가는 겨울 밤에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빚은 만두를 돌멩이처럼 꽁꽁 얼려서 자루에 담아 두었다가 세배객들이 오면 따끈하게 쪄서 대접한다. 몽골사람들은 이렇게 얼려두고 쪄먹는 차간사르 보츠가 특별히 맛이 좋다고들 한다. 같은 김치라도 김장 김치의 맛이 특별한 것과 같다.

만두 빚기가 끝나면 히잉붜우라는 밀가루 과자를 소기름에 튀겨낸다. 나무 떡살로 무늬를 찍어 큰 남자의 팔뚝 만한 크기로 넓적하게 튀겨낸다. 나무쟁반에 차곡차곡 쌓고 백색의 차간이대(‘하얀 먹거리’란 뜻으로 각종 유제품을 총칭함. 고기는 ‘붉은 먹거리’라고 한다)와 각설탕 등을 눈처럼 수북하게 올려서 장식한다. 한국의 설 음식인 가래떡처럼 한번 해서 겨우내 먹는 음식이다. 깨트린 조각을 뜨거운 차에 담가 불려서 맛나게들 먹는다.

▲ 세배하러 온 학생들과 전통게임을 하고 있는 불교미술대학 학장 스님 옆으로 밀가루 과자를 쌓아놓은 히윙붜우와 앞쪽으로 삶은 양고기 오츠의 일부가 보인다.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차간사르 음식은 오츠다. 기름이 잘오른 통통한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삶아서 은도금을 한 구리쟁반에 고인다. 이방인이 보면 삶은 양고기 한 쟁반처럼 보이지만 각 부위를 고이고 잘라서 나누어 먹는 방법이 한국의 차례상만큼이나 복잡한 격식과 절차가 있다. 세배객들은 주인남자가 잘라주는 오츠를 반드시 한 점이라도 먹는 것이 예의다.

몽골에 처음 가서 살던 1990년대 초반에는 야채랄 것이 없었지만, 식료품 사정이 좋아지면서 필자는 이런 몽골의 설 음식들 외에 양배추로 담근 김치를 다져 넣은 만두와 김밥, 갈비찜, 잡채, 양배추 물김치, 설탕물로 끓여서 차게 식힌 과일 등도 준비한다.

학생을 가르치며, 작품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 70년간의 공산 박해로 사라질 뻔한 몽골 불교미술을 다시 복원하는 여러 위급한 일들이 산적해 있어도 필자는 해마다 최선을 다해 차간사르를 준비한다. 솔롱고스 비르(한국인 며느리)가 마련한 특별한 새해 선물과 음식들을 기대하며 설날 아침이면 줄을 지어 제일 먼저 우리 집부터 오는 동네 꼬맹이들과 동지 같은 제자들, 모든 고마운 세배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풍성하고 즐거운 설날의 추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신나고 즐겁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리 부잣집 며느리라도 누려보기 어려운 즐거움이라서 더욱 신이 난다.

/ 김선정 교수

■ 필자 김선정은?

-홍익대학교 동양학과 졸업
-인간문화재 14호 이만봉 스님 문하에서 한국탱화, 달라이라마 전속화가인 상계예시 스님과 규도 밀교대학 미술학 박사인 게쉬쌈텐 스님 문하에서 밀교미술 수업
-현재 MIBA 몽골불교미술대학 부학장으로 ‘몽골의 문화전사’들을 양성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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