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꽃은 져도 향기는 남는다
<80> 꽃은 져도 향기는 남는다
  • 독서신문
  • 승인 2015.01.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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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영의 풀 향기

▲ 황태영 수필가

[독서신문] 무당이나 기생은 조선시대 팔천민(八賤民) 중의 하나였다. 천민들은 사람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일반 양인들이 사는 마을 안에서는 살 수가 없었고, 양반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평민 심지어는 어린아이에게조차 존댓말을 써야만 했다. 그 뿌리가 워낙 깊어 아직까지도 그 잔상이 남아있다. 동초 김연수 선생은 당대 명창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의 사설을 정리하고 현대화에 앞장서 판소리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동초 선생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974년에 작고하신 후 김포 공동묘지에 묻히셨다. 나중에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수제자 분이 선생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이장하려 했다. 이때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동네 유림들이 강하게 반대한 것이다. "어떻게 무당집 자식을 마을 앞산에 묻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또 고흥군청 뒤에 있는 선생의 기념비를 세울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무당 집안의 광대 출신을 군청 뒤 공원에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느냐"며 유림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인간문화재로 판소리계의 큰 별이셨던 동초 선생조차 죽어서까지 천대를 받을 정도로 천민의 삶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고 한이자 서러움이었다. 기생도 다를 바가 없었다.

통영에서 권번 출신 할매 한 분이 손자 소풍을 따라갔다. 푸른 신록과 막 부풀기 시작한 꽃들이 모두를 들뜨게 했다. 노인도 청년이 될 수밖에 없는 그늘마저 눈부신 날이었다. 술도 잘 들어갔다. 떠들고 놀다가 흥에 취하자 돌아가며 장기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젊은 축들이 노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그러자 오다가다 한 사람씩 자꾸 톡톡 쳤다. "할머니도 한곡 하세요." 손사래를 치며 웃어 넘겼다. "그 나이 자시도록 노래 한곡도 못 배우셨습니까?" 취기는 오르는데 자꾸만 건드리니 참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할매도 마이크를 잡고 말았다.

막상 시작을 하니 슬슬 예전의 배운 가락이 절로 스며 나왔다. 모두들 침묵하고 할매만 쳐다보았다. 전축이나 라디오에서 듣던 프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정적을 깨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기생이다." 들떴던 소풍은 그렇게 끝이 났다. 손자는 울면서 뛰쳐나갔고 며느리는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느냐"고 타박을 했다. 아들은 아예 호적에서 파자고 했다. 할매는 "호적이 무슨 우물이냐"며 섧디 섧게 우셨다. 그날 밤 할매는 한잔 가득 부어 음독을 하고 이승의 한을 내려놓았다. 통영바닥의 모든 예술을 한 몸에 휘감았던 그 할매는 기생이란 한마디에 한자락 노래로 이승의 소풍을 마감해야 했다.

노리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취객의 그 어떤 몹쓸 주사도 다 견딜 수 있었다.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우고 싶었다. 자신은 망가져도 자식만 반듯하면 되었다. 거칠고 험한 온갖 풍상에는 굽히지 않았지만 "호적을 파자"는 단 마디에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자식들은 할매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희망이 있었기에 지탱할 수 있었다. 그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할매는 차라리 떨어지는 꽃잎이 되고 싶었다.

소매 몌(袂)자에는 남모를 애틋함이 있다. 이별 별(別)자에는 한 서린 먹먹함이 있다. 몌별(袂別), 봄이 오면 꽃 피듯 만나고, 가을 되면 낙엽 지듯 덧없이 떠난다. 회초리 맞아가며 배우고 익힌 소리와 춤은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그렇지만 식구들은 창피해하고 싫어한다. 젊어서는 갖은 천대와 수모를 받아야 했고 나이 들어서는 '나는 모르오'하고 숨어 지내야만 했다. 나에게도 곱고 청순한 꿈이 있었는데, 맺힌 것을 삭히고 또 삭히며 한없이 흐느끼기만 해왔는데, 꽃피는 봄날 한 순간의 정취를 이기지 못한 것이 그토록 크나 큰 죄란 말인가?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었던 아들, 꽃보다 고운 손자를 두고 차마 몌별해야만 한단 말인가?

기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남들의 등을 쳐 먹은 돈으로 기생을 노리개 취급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기생이 창피한 것이 아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모르는 강자의 갑질이 창피한 것이다. 세상에 해악을 끼치면서도 죄 의식이 없는 사람에 비하면 할매는 참으로 곱고 아름답게 사셨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후안무치에 비하면 할매는 참으로 당당하게 사셨다. 명함이 깨끗한 사람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좋다.

무당, 기생이 천한 것이 아니라 처절한 삶을 손가락질하는 빛 좋은 무위도식이 천한 것이다. 봄은 다시 오고 꽃도 다시 피겠지만, 또 봄도 쉬 가고 꽃도 쉬 지겠지만, 봄이 간다고 들뜨던 봄빛을 잊을 수 있겠는가, 꽃이 진다고 그 설레던 향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고와야 춤도 곱다. 마음이 아름다워야 소리도 아름답다. 할매는 다시 볼 수 없지만 그 눈물 젖은 소리는 따뜻하게 멀리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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