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배경: 제국의 위기와 기독교
시대 배경: 제국의 위기와 기독교
  • 독서신문
  • 승인 2014.12.3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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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최근 대학의 상아탑 안에 머물던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강의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이같은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지속시키고 인문학 열풍을 더욱 확산시키고자 유명 석학들의 강연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 편집자 註

[독서신문] I.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

⑴ 로마평화(pax Romana)의 시대: 1~2세기

역사가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면서 시작된 약 2세기 동안(기원전 27~기원후 180년)의 태평성대를 로마사의 가장 복된 시기로 기억한다. 그중에서 특히 마지막 약 40년(135~180년)은 평화와 번영을 한껏 구가한 때로, 통상 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로 구별한다.

그런데 이 왕조는 좀 각별했다. 핏줄이 제위계승의 절대조건이 아니라, 원로원에서 인망이 두터운 인물을 양자 삼아 통치훈련을 거쳐 제위에 오르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혁신적 왕조체제 덕분에 황제권력은 좀처럼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으며, 다행스럽게 이렇다 할 변경의 위험도 없었다. 오히려 평화 무드가 너무 농익은 나머지, 한 황제는 간헐적인 침입세력을 돈으로 매수해 변경 너머의 위협을 막으려 할 정도였다.

⑵ 3세기 제국의 위기

① 위기의 발단 (180~235년)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 대내외적 축복은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혁신적 시스템의 원칙을 깨고, 친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위에 오른 친아들 콤모더스는 행정과 제국방위에 무심한 폭군으로 드러났고, 결국 측근 음모로 살해당했다.

즉각 황제 자리를 두고 속주의 군지휘관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일단 북아프리카 출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제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193~235년). 전통적으로 원로원층과 황제를 배출해 온 지역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 남부) 밖에서 처음으로 황제가 나온 점, 그 새 왕조가 원로원과 협력하기보다 군대에 갖가지 특권을 수여해 황제권력의 안보를 꾀한 점 등은 향후 제국통치 체제가 겪을 근본적 변화의 전조였다.

② 정치·군사적 내우외환 (235~284년)

단명한 세베루스 왕조 이후 약 반세기 동안(235~284년)은 왕조가 새로 성립되기는커녕 황제의 평균 재위기간이 1년여에 불과한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 하는 시기였다. 대부분 원로원보다 군대가 추대하거나 군대를 배경 삼아 황제를 자처한 경우로, 26명 중 단 두 명을 빼곤 모두 비명횡사했다.

이렇게 내부 혼란이 기승을 부리자 변경 너머의 위험도 증가했다. 무엇보다 변경 너머에서 일어난 인구압의 팽창 혹은 새 강대세력의 출현 탓이었다. 라인-다뉴브 강 변경 지대에는 프랑크족, 알레마니 족, 고트 족 등 새로운 게르만 부족이 이동해 빈번히 변경안으로 침투했고, 메소포타미아 방면에서는 새 페르시아 왕조(사산조)의 초대 왕들이 제국 동쪽 변경을 유린하고 심지어 로마 황제를 포로로 잡아갔다.

③ 복합적인 위기(235~284년)

필연적으로 황제권의 성격에 몇 가지 변화가 뒤따랐으며, 그것은 제국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의 여러 국면에 파급돼 복합적 위기의 양상을 띠었다. 우선 황제권의 불안은 군대매수 (주로 급료인상)로 이어졌고, 따라서 황제는 세입과 그것을 징수할 인력 (관료조직)을 확장해야 했다. 군대, 세금, 관료의 급성장이 시대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관료조직에 의한 징세는 더뎠고, 자금이 급한 황제들은 제국 조폐창에서 귀금속 함유량을 줄인 저질 화폐를 찍어내는 편법에 의존하곤 했다. 물가상승이 뒤따랐고, 화폐는 차츰 통화수단, 특히 징세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현물경제가 대세가 됨에 따라 세제도 현물세(인두세, 토지세)로 대체됐다. 속주도시의 부자엘리트들은 황제가 강제로 떠맡긴 세금대납의 책임을 피하려고 혈안이었다. 로마 제국은 여러모로 통합과 구심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II. 로마 제국의 종교 사정: 이교(異敎)와 기독교

제국의 이 전반적 위기 속에서 주민의 ‘불안’이 팽배했고, 사회적 약자일수록 더했다. 사회적 불안은 당연히 종교적 변화로 이어졌다. 로마 전통종교는 제국의 정신적 지주라는 관념에만 의존할 뿐, 도덕적 타락과 물질주의가 만연한 세태 속에서 동요하는 주민의 마음을 붙들지 못했다. 자연히 새로운 종교에 대한 갈망이 거세게 일어났고, 기독교는 그 속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다.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교세가 커졌고, 전통종교의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과 탄압도 그만큼 강렬했다. 기독교도는 그들에 적대적인 전통종교를 이교(異敎, paganism)라 불렀다

⑴ 새로운 종교현상들
3세기의 위기 속에서 드러난 종교적 변화의 하나는, 제국 중앙이든 속주 도시든 공식 종교가 점차 쇠퇴했다는 점이다. 공식 종교의 권위와 통치권의 안정은 서로 긴밀히 연관돼 있었으므로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였다.

쇠퇴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공동체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신들에 대한 제사가 소홀히 취급되고, 심지어 사제조직이 무너진 속주도시들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수도 로마는 전통 종교의 최후의 보루였다. 제국과 자신의 권력, 권위를 지키기 위해 원로원이 전통 제사의 중요성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들은 수도 로마와 그곳의 원로원 집단, 그리고 공식 종교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현상은 혼합주의 일신교의 대두였다. 지금까지 제국의 종교에서 일신교란 오직 유대교와 기독교뿐이었다. 하지만 이교에서도 일신교의 경향이 나타났다.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광대한 제국이 용광로 같은 역할을 해 각 지역의 종교들이 서로 오래 뒤섞였기 때문이다.

⑵ 기독교의 성장

300년경 로마 제국의 기독교 인구에 대한 추정은 대체로 5~10% 정도였다. 기독교가 숭배의 비용이 저렴한 점, 조직력과 교리가 탄탄한 점(특히 장례공동체의 성격), 여성 신도의 가족포교 등 다른 종교에 없는 몇 가지 강점 덕분에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역시 순교행위의 충격이 가장 컸다.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강렬하게 증언하는 행위는 교인의 결속을 강화하고, 이교도에게는 회심을 자극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주로 노예, 도시 빈민 같은 사회적 약자에 호소력이 있었고, 상류층 여성도 적지 않았다.

⑶ 기독교 박해의 역사

기독교도가 쓴 박해사를 보면, 박해의 모든 책임을 주로 당대 황제에게 돌리지만, 실상은 대개 속주 도시(들)에서 일어난 이교 주민과 기독교도 사이의 지역적 갈등이었다. 이교도 사이에는 야간회동, 영아살해, 식인, 통음, 혼음 등 기독교에 대한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지만, 억측을 걷어내면 주로 불신은 기독교의 일신교적 배타성 때문이었다. 이교도는 필요에 따라 많은 신을 섬겼고, 속주도시의 공식 숭배는 대개 그런 다신교적 제사의 형태였다. 하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의 수호신들은 물론 황제를 위한 제사도 우상숭배라 하여 거부했다. 이교도의 눈에 기독교도는 ‘신을 섬기지 않는 자’였다.

3세기 이후, 특히 제국 동부에서, 이 편견과 불신은 적대감으로 발전했다. 제국 동부가 외침의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됐고, 이교도는 제국의 동요와 사회불안을 기독교 탓으로 돌리곤 했다. 게다가 기독교 교세가 커지고, 회당을 짓는 등 기독교의 활동이 점차 가시화되자, 상류층 이교 주민은 시 당국을 통해 혹은 로마 총독에게 호소해 이를 규제하려 했다.

/ 정리 = 한지은 기자

*본고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인문강좌’(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김경현 고려대 교수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발췌 수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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