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느림의 미학
  • 독서신문
  • 승인 2014.09.2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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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산정(秋日山情)'

[독서신문] 유하는 「천일馬화」 연작시에서 욕망이 욕망하는 소비 자본주의 속살을 ‘경마장’을 통해 민낯을 드러나게 하고 있다. 자본과 물질을 향해 끝 모를 질주를 재촉하는 박차는 속도전의 상징성으로 의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박차는 승마 구두 뒤축에 댄 톱니바퀴로 말의 배를 차 빨리 달리게 하는 데 쓰는 도구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배를 아프게 하여 다다르는 곳에는 소비자본주의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자본획득에 대한 속도는 자기 자신을 잊게 하여 속도 무아경(無我境, ecstasy)에 빠지게 만든다. 속도전에 대한 기술혁명을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ecstasy에 몰입한다”고 쿤데라 비판하고 있다.(밀란 쿤데라, 『느림』, 7쪽)

속도는 몸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게 만들어 인간성 상실과 인간성 파괴로 이어지게 만든다. 때문에 쿤데라는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고 말한다.(밀란 쿤데라, 『느림』 48쪽)

두 개의 은륜이 굴러간다/ 엔진도 기름도 없이 오직/ 두 다리 힘만으로/ 은륜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빔이 바퀴살과 페달을 존재하게 하고/ 비로소 쓸모 있게 한다/ 텅 빔의 에너지가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언제나 은륜의 텅 빈 중심을 닮고 싶었다/ 은빛 바퀴살들이 텅 빈 중심에 모여/ 자전거를 굴리듯/ 네 상상력도 그 텅 빈 중심에 바쳐지길/ 그리하여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찬란한 시의 月輪을 굴리기를, 꿈꾸워왔다/ 놀라워라, 바퀴 안의 無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희망의 페달을 밟게 한다/ ...../ 길이여, 나를 태운 은륜은 게으르되 게으르지 않다/ 무의 페달을 밟으며/ 내 영혼은 녹슬 겨를도 없이 自轉하리라
- 유하, 『천일馬화』, 「無의 페달을 밟으며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1」 중에서

기계문명의 속도, 소비 자본주의 속도는 정신을 잃게 만든다. 하지만 자전거는 경주마처럼 빠르게 달릴 수 없다. 그것은 ‘느림’으로 자연과 ‘교감’이다. 자전거 라이딩은 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고, 자신이 누구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자신의 발로 밟아 돌려 만든 원형의 ‘텅 비어 있음’ 속으로 들어가 ‘비로소 쓸모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텅 빈 중심’은 ‘텅 빔의 에너지’로 모습을 드러낸다. ‘텅 빈 중심’에 있는 ‘텅 빔의 에너지’는 ‘자본과 물질로 향한 에너지’가 아니라 선한 이데아로 항해하게 만드는 ‘선한 에너지’이다.

원형의 완벽한 선한 solar( 태양)의 이데아는 선한 빛이며 명징한 세계이다. 때문에 ‘네 상상력도 그 텅 빈 중심에 바쳐지길’ 원하게 된다. ‘바퀴 안의 무(無)’는 그냥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자연 상태의 그냥 있음은 ‘끊임없이 희망의 페달을 밟게 한다.’

‘무의 페달을 밟으며’ 음험한 속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내 영혼’이 ‘녹슬 겨를도 없이 자전(自轉)하게’ 만드는 자전거 라이딩은 기계가 만들어 내는 속도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몸부림이다.

/ 편집위원 검돌(儉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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