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금 용
한밤에 여든 살 할머니가 마실을 가시네
비 내리는 여름밤을 통째로 메고 가시네
어둠이 엎질러질까봐 우산 받들고 가시네
고인 웅덩이마다 눈도장 한 번씩 찍으며 가시네
낮은 처마 아래 어깨 굽은 가게를 찾아가시네
대형 슈퍼마켓은 어지럽다고 서 있기만 하던 할머니
주머니에 동전 몇 닙 달랑거리는 날이면
빗줄기 친구 삼아 뒤뚱뒤뚱 집을 나서시네
압록강 너머 말동무 그립다고
한여름 밤 마음 호사 부리러 마실 가시네
- 시집 『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에서
■ 김금용
○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원 졸업
○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광화문 쟈콥』, 『넘치는 그늘』
○ 펜 번역문학상, 동국문학상 수상
■ 감상평
나이 들면 말동무가 필요하다. 말동무 만나는 일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시의 대형마트에 가면 왠지 모든 것이 낯설어져 버린다. 낯설어져서 마음도 닫히고 느낌도 닫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골 마을의 어깨 굽은 초라한 구멍가게에 들어서면 가게 주인이 노인이건 젊은이건 아이건 상관이 없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마음이 열리고 가슴이 열리게 된다. 만나러 가는 길마저 행복하다. 시의 배경이 꼭 이 땅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리 마을이건, 조선족 마을이건, 아니면 어떤 다른 민족 마을이고 노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지난 시절에 대한 정보가 당연히 가장 많이 들어있다.
/ 장종권(시인, <리토피아> 주간, <아라문학>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