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준
누군가
정다운 음성
봄비 내리는 첫새벽
창문을 열고 듣는
토닥토닥 그 소리
잘못 돌린 다이얼에
이가 맞지 않은 주파수
찌직 찌직
싫은 소리 토해내고
아,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
가다가도 돌아서서
제 길로 들어서야지
새삼스런 그 음성
봄비 되어 내리는 새벽
[이해와 감상]
눈에 보이진 않는 것을 보는 시인의 밝은 눈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시를 쓰는가. 만약에 누가 시를 다만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기 위한 언어의 운률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시문학에 대한 큰 오류라고 하련다.
시는 어떤 의미로서나 삶의 진실을 탐구해내는 언어의 운률적이 예술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자아’(自我)란 인간 개인의 사고(思考), 감정, 의지 등의 담당자로서의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한 말로부터 시작됐고, 20세기에 이르면 시인 W.H.오든에 의해 ‘사회의식의 문학’이 제창되기도 했다.
나는 최홍준 시인의 ‘봄비 되어 내리는 새벽’의 시 「회심(悔心)」을 읽으며 오랜날 까마득하게 잊었던 소크라테스며 W.H.오든이 주창한 인간의 자성(自省)과 회오(悔悟)의 시문학의 진실을 거듭 깨닫게 됐다. “아,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 가다가도 돌아서서/ 제 길로 들어서야지/ 새삼스런 그 음성/ 봄비 되어 내리는 새벽”(마지막 연).
독자 여러분은 2014년 새봄을 맞아 새벽녘 ‘봄비’내리는 소리에 무엇을 느끼셨냐고 감히 묻고 싶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꿈의 판단』에서 “지금까지 성스러웠던 것이 사악한 것으로, 지금까지의 죄악이 양심으로 바뀐 것”을 끄집어내지 않았던가. 인간의 내면 세계를 꿰뚫어내는 시인의 밝은 눈과 또한 봄비 소리가 마냥 정답다.
/ 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