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적 사유의 자유(I)
인문적 사유의 자유(I)
  • 독서신문
  • 승인 2013.07.2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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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의 _ 이것을 저렇게도 - 다원주의적 실재론
최근 대학의 상아탑 안에 머물던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강의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이같은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지속시키고 인문학 열풍을 더욱 확산시키고자 유명 석학들의 강연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 편집자 註

[독서신문] 인문성과 가능성 언어

“이게 뭐야?” 2살짜리 아이의 물음이다. “강아지야!”라고 대답하면 그러면 “강아지는 뭐야?”라고 되묻는다. 아직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계속 묻는다. 그러나 질문의 대상이 되었던 강아지는 엄마 개에게 비슷한 물음을 물을 것인가? 개들도 물음과 대답의 낌새가 있는 행동을 보이는가? 아니다.

아이와 강아지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이는 어떻게 물음에 물음을 이어갈 수 있는가? 강아지는 왜 아무런 물음도 묻지 않는 것일까? 독자적 생존능력은 오히려 강아지가 더 강할 텐데, 왜 물음의 능력은 아이에게 돋보일까?

이는 언어 때문이 아닐까? 언어는 아이로 하여금 주어진 환경의 소여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만, 언어 없는 강아지는 그 소여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아이는 벌써 주어진 환경의 의미를 물으면서 제한적인 환경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인간의 모든 지성적 활동은 아이의 물음처럼 주어진 조건의 사실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질서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구는 아이에게서처럼 언어를 통해 ‘사실의 감옥’으로부터 ‘가능성의 의미’를 향하는 것이다. 그렇게 향해 추구하는 가치를 인문성(人文性)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의미론적으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언어는 한국어나 영어 같은 자연 언어뿐만 아니라 소통이나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방식의 매체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언어다. 그러므로 인문성은 아이의 물음에서처럼 인간 활동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있는 편재적(偏在的)인 가치인 것이다. 즉 인간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인문학의 계기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는 벌써 인문적이 된 것이다.
 
 
문사철의 인문성

문학의 인문성은 그 재미만큼 확실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는 작품이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테바이 도시의 왕이고 어머니는 요카스타 왕비였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神託)을 받고 태어났다. 왕과 왕비는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 아기 오이디푸스를 바구니에 담아 코린토스와 인접해 있는 키타이론 산에 버렸다. 그러나 아기는 코린토스의 왕 풀뤼보스와 그 왕비 메로포이의 양자가 되고, 자라면서,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으로 괴로워하다가 방황하게 된다. 유랑 중 어느 날 오이디푸스는 좁은 길에서 한 대의 마차를 만나게 되고 서로 길을 비키라는 요구를 하다가 싸움이 벌어져 그 마차의 마부와 차주를 죽이게 됐다. 그 차주가 바로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다. 테바이 도시는 왕을 잃고 곤경에 처하지만, 오이디푸스가 그 곤경을 극복해주어, 인정을 받고, 그 도시의 왕위와 왕비를 얻게 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색출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자신이 그 살해자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요카스타 왕비는 밧줄로 목을 매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찔러 맹인이 된다. 그리고 딸이자 동생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도시를 떠난다.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성 그리고 그 인문성은 두 가지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비극은 인식적이다. 오이디푸스가 마차의 차주를 죽였을 때, 오이디푸스는 그를 ‘마차의 차주’로 인식했지만,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 그리고 ‘나의 아버지’라는 기술 하에서도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몰랐다. 오이디푸스가 요카스타와 결혼했을 때 오이디푸스는 요카스타를 ‘테바이의 왕비’라는 기술 하에서만 인식했고, ‘나의 어머니’라는 기술 하에서도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몰랐다. 인간의 대상 인식은 특정한 기술 하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대상에 참으로 적용될 수 있는 모든 기술 하에서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오이디푸스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한계조건이다.

둘째, 이 비극은 필연적이다. 많은 사랑의 비극은 『좁은 문』, 『깊은 슬픔』에서처럼 슬픈 것이긴 하지만 ‘우연적’이다. 그 주인공들은 새로운 사랑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자 결혼의 비극은 ‘필연적’이다. 모자 결혼은 비윤리적인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상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사태이다. 모자 결혼의 금지는 인간사회의 구성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인문성은 인간 인식의 기술 의존성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뺐지만 독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요카스타가 자살을 했을 때 독자는 이 비극의 필연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학의 인문성은 자명하다. 역사서들은 그러한 인문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기원전 440년경에 저술된 책으로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시작된 항쟁에서부터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에 쓰여진 책으로 옛 신화시대부터 전한 초기인 기원전 2세기 말 한 무제(漢武帝) 때까지의 역사를 적었다.

이런 역사서들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인문적이다. 첫째, 이런 책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그만큼 인간 역사의 중요한 부분들에 접근할 수 없거나 망각한 채로 살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인류가 역사적으로 연대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해주고 자연종으로서의 인간이 보편적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인문성을 보여준 것이다. 둘째, 역사가는 역사 현상을 기술할 때 ‘객관성’을 추구하지만 그의 관점으로부터 가치들의 종류, 가치들의 우선순위, 이야기의 틀, 내용을 선택해 구성하게 된다. 역사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역사 현상이라는 ‘사물적 잡다함’을 ‘하나의 질서 있는 의미 체계’로 진입시키는 것이다. / 정리 = 윤빛나 기자
 
* 본고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인문강좌’(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이것을 저렇게도 - 다원주의적 실재론’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발췌 수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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