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에세이'
|
해마다 학기 초 또는 방학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곳 일본의 한국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필독서 압박에 시달린다. 아이들의 손에 들린 목록을 보면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아가 아이들이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할 능력마저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필독서 목록에는 위인전, 전래 동화, 창작 동화, 교과서에 실린 동화, 과학 동화 등 짜맞추기 식으로 20여권의 제목이 올라와 있다. 4학년 필독서가 1학년 필독서로 옮겨간 것을 발견했을 때는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도대체 필독서는 누가 무슨 근거로 결정하는지 묻고 싶다.
답답한 마음에 일본인 학부형들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은 '필독서'라는 말 자체가 낯설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참 설명을 들은 후 겨우 이해했는지, 일본도 추천도서목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책을 읽든 말든 아이들의 자유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서점에서 책을 사기보다는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오는데 선택권은 전적으로 아이들에게 있다고 했다. 지인 중 한 사람인 일본 출판사 직원은 서울 도서전에 다녀와서 재미있는 풍경을 보고 왔다고 했다. 도서전 마지막 날에 책을 판매하는데 아이들은 없고 모두 어머니들이 시장에 쇼핑을 하듯 책을 사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어가 능숙해서 한국 지인을 많이 두고 있는지라 한국 가정에 가끔 초대되어 가는데, 아이들 공부방이나 거실 벽에 장식 되어있는 많은 책들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집을 가도 비슷한 책들이 많아서 자세히 보니 전집들이 주를 이루었고, 단행본 역시 비슷한 책들이 많은 것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아이들에게는 전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귀띔을 해줬다.
학원에서 논술을 강의하면서 도서 선택과 관련, 한국 어머니들의 태도에 놀란 적이 많다. "우리 아이는 고학년인데 아이가 학원에서 빌려온 책은 저학년 용이다. 우리 아이는 책을 많이 읽어서 두꺼운 책도 소화할 수 있으니 좀 더 글이 많은 책을 보내달라. 학교에서 정해준 필독서를 빌려달라." 6~7세용, 저·중·고학년용, 거기에 필독서 이렇게 나눠놓고 아이들이 책 읽기를 싫어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양서에도 나이가 있는지 답답한 현실이다. 아이들에게도 분명 읽고 싶은 책이 있고 잘못 선택했다 싶으면 자연히 스스로 손을 놓기 마련이다. 학원에 온 아이들에게 읽고 싶은 책을 고르라고 하면 "선생님이 추천해 달라"며 조르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기껏 골라줬는데 "이런 책 빌려가면 엄마한테 혼나는데요…." 이쯤되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독서에 연령이 있는가? 누구나 읽고 느낄 수 있으면 그만 아닌가. 그 나이에 배워야 할 것, 읽어야 할 것 등으로 너무 많은 틀을 만들지 말자. 다양한 양서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너무 좁은 울타리에 우리 아이들을 가두지 말자. 아이들은 자기 주도적 독서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간다. 아이들의 눈높이를 의심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책 선택권을 돌려 주자. 아이들이 선택해서 읽는 책만 봐도 내 아이가 지금 무엇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내 아이가 쥐고 있는 책을 같이 읽고 아이와 독서 토론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생긴다면 장식용 전집은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을 것 같다.
/ 도쿄(일본) = 이하빈(르포 작가, 동경싱싱아카데미 부원장)
저작권자 © 독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