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보이는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 독서신문
  • 승인 2007.07.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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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신문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동생들과 함께 큰집으로 제사를 모시러 다녔다. 늦은 밤에 도착한 고즈넉한 두메산골, 태초의 순결성으로 말을 걸어오곤 했던 그 곳은 더 이상 자연의 햇살과 바람이 한바탕 놀다 떠난 자리가 아니다. ‘기술시대’와 ‘인공낙원’이 들어선 곳에선 더 이상 ‘아담의 말’을 들을 수 없다. 햇살과 바람이 사라진 곳, 태초의 밤이 사라진 그 곳은 無로 환원 될 수 없게 되었다.
  농사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캄캄한 그믐밤을 걸어도 발을 헛디디는 일이 없었던 땅. 어둠속에 무언가 있었던 순수한 없음의 있음을 경험한 시간은 분명 있었다. 비가 내려 냇물이 불어나고 도랑물이 넘치고 길이 패이고 둑이 무너지면 바지를 걷어붙이고 논두렁을 향해 달려갔던 실체의 있음을 확인했던 순간의 고통은 빛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빛은 사물로서 형상을 드러내게 한다. 자연의 빛은 이성의 빛이라고 데카르트는 정의했다. 그러한 빛이 투명하게 애매한 모호성으로 이성의 공간에 모여들어 태초의 순결성을 사라지게 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일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길들은 양 언날개를 파닥거린다./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
-정지용, 「유리창」전문-
  빛의 공간에 날아든 죽음이 지속성을 절단하여 위협하고 있다. 익명의 위협은 향유와 거리를 거부하고 주체성을 파괴해 버렸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이 자꾸만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리게 만든다. 이보다 고통스런 일이 있을까! 고통 속에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는 가운데 휘영청 달 밝은 밤이 찾아왔다.
  한꺼번에 밀어닥친 슬픔이 천천히 논두렁과 방죽(防築)을 따라 걷고 있다. 무논(물이 늘 있는 논)에 비친 달만이 같이하고 있다. 걸어도걸어도 물속에 있는 달은 자꾸만 따라온다. 문득 눈물이 흘러내리고, 흘러내린 눈물은 “물먹은 별이”되어 “반짝 보석처럼 백”혀 온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아보니 그곳에 월인천강(月印千江)이 스며있다.
  “외로운 황홀한 심사”에 부처님의 따스한 손길이 즈믄 가람을 비추고도 남아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있는 우리마음을 정화시켜주면 좋으련만 말과 빛과 이성이 공유했던 공동체의 시간이 죽음으로 깨져 “아아, 너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
  태초의 순결한 말이 사라진 자리에 자아중심주의, 엘리트주의, 자폐적 이기성, 나르시시즘, 소통의 부재, 인간성 상실 등이 주인인양 앉아, ‘랑그’를 교란시키고 가정과 가상의 문법으로 근원적 부조리, 원초적인 고독, 거머쥘 수/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의미만 관계 속에 풀어놓고 있다.
  그 위로 달이 떠올랐다. 태초의 순결성을 간직하고 있는 태초의 밤에 떴던 달의 모습은 아니지만 달은 지금도 천개의 강을 두루 비추고 있다. 그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본다. 어디를 보고 自覺할 것인가. 달인가. 손가락 끝인가. 지금 눈앞에 무엇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아아, 너는 산ㅅ새처럼 날러간” 태초의 순결성, 태초의 밤에 떴던 달을 보기위해 유리창 앞에 서보는 늦은 밤이다.
 
읽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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