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회
황종회
  • 황인술
  • 승인 2007.06.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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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생 논술교실
Ⅰ. 생각해보기 

황종희 [黃宗羲, 1610~1695]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살았던 학자. 박람(博覽)과 실증(實證)을 존중하고, 청나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명대의 철학사(哲學史)라고 할 『명유학안(明儒學案)』, 군주 독재제도를 통렬히 비판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명저(名著)로 알려졌다.
   자는 태충(太沖)이요, 호는 이주(梨洲)·남뢰(南雷)이며, 절강성 여요(餘姚)출신이다. 아버지 황존소(黃尊素)는 동림당(東林黨)의 명사로, 동림당 탄압 때 옥사하였다. 황종희는 숭정연간(崇禎年間:1628∼1644)에 당시의 문학적 결사 '복사(復社)'에 가맹하여 환관파(宦官派)를 배척하는 정치운동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고향의 젊은이 수백 명을 모아 의용군을 조직하였고, 또한 명나라 유왕(遺王)인 노왕(魯王)을 따라 만주(滿洲)에서 청군(淸軍)에 저항하였다. 그뒤 고향에 돌아가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청나라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평생토록 이민족의 군주를 섬기지 않았으며, 명사(明史)의 편찬시에는 아들과 제자를 명사관(明史館)에 보내어 고국의 역사를 남기려고 힘썼다.
  『명유학안(明偶學案)』, 『송원학안(宋元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의 학술서가 있고, 문집으로는 『이주유저휘간(梨洲遺著彙刊)』이 있다.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성인군자가 나타나서 정치에 대하여 하문(下問)할 것을 기대하여 현신(賢臣)이 그에 답하기 위하여 요강(要鋼)을 서술한 책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전통적인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에 관한 중요 문제를 13 항목으로 나누어 21 장으로 서술하였다.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일반적으로 서명을 보면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비하여 이 책은 서명만을 보고 쉽게 내용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본래 이 책의 원명은 『대방록(待訪錄)』이다. 그런데 전조망의 『이주선생신도비문』과 정성, 정대절 부자가 이로각에서 출판할 때 ‘명이(明夷)’ 두 글자를 붙여서 비로소 『명이대방록』이 되었다. ‘명이’라는 말은 『주역』64괘 중에서 36번째에 해당하는 괘명이다. 이괘(離卦)가 아래에 있고 곤괘(坤卦)가 위에 있는 이하곤상(離下坤上)으로 “밝음이 손상된다”는 의미이다. 단사(彖辭)에는 “밝은 빛이 땅 속으로 들어간 괘상을 명이(明夷)라고 하는 것이니, 안으로는 밝은 덕이 있으나 밖으로 유순하여 큰 어려움을 겪는다. 문왕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어려워도 마음이 바르고 곧아야 이롭다는 것은 그 밝은 빛을 가린다는 뜻이다. 안으로 어려우나 그 뜻을 바르게 할 수 있다. 기자가 이것을 몸소 행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전>에서는 ‘명(明)’을 ‘일(日)’로 ‘이(夷)’를 ‘멸(滅)’ 또는 ‘몰(沒)’자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명이’는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땅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형상을 의미한다. 이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현명한 사람이 폭군에게 핍박받고 박해받는다는 뜻이 된다. 공영달은 〔주역정의〕주소에서 “포악한 임금이 위에 있고 현명한 신하가 밑에 있으니, 감히 그 지혜를 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명이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황종희는 명나라가 오랑캐에 의하여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된 상황을 공교롭게도 명이괘에서 ‘문명(文明)’함이 땅 속에 매몰된 상태에 비유하여 ‘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대방’은 무슨 뜻인가? 누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인가? 이에 대해 황종희는 “나는 비록 늙었으나 기자처럼 총명한 군주의 자문을 맡을 기회가 오지는 않을까 바라마지 않는다”라고 하여 자신을 기자에 비유하고 있다. 기자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의 숙부로서 주왕의 폭정을 간하다가 노예가 되었다. 그후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정복한 뒤 무왕은 기자를 오히려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자 그의 은신처까지 방문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을 묻게 되었다. 이 때 기자가 자신의 정치적인 구상을 담은 홍범구주를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황종희 자신도 이와 같이 언젠가 현명한 군주가 일어나 천하를 이끌어 갈 경세제민책을 구할 것을 대비하며, 그 날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대방’에 담겨 있다. 이를테면 퇴조하는 명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정치체계 내지 원리를 세워 어진 군주를 기다리는 선비의 우국충절이 담긴 저서이다. 이로 인해 이 책은 뒷날 청말의 혁명에 원동력이 되었고, 중국 근대사상의 맹아(萌芽)로도 평가되었다.
-황종희, 최병철 역, 『명이대방록』, 홍익출판사, 1999.
 
정치사상
   1663년에 완성되었으며 군주론(君主論) ·신하론(臣下論) ·법제론(法制論) ·학교론(學校論) 등 13편으로 되어 있다. 군주론에서는 천하를 사유재산처럼 생각하는 전제군주의 폐해를 철저하게 폭로하여 ‘천하가 주인이고 군주는 손님이다’라고 하였다. 또, 학교론에서는 학교에 의회적 기능을 주어 세론(世論)을 대변하게 하는 등 국가체제의 전반적 개혁을 구상하였다. 그의 민본주의적(民本主義的) 주장이 들어가 있는 이 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같은 역작이다. 황종희가 살았던 명말청초는 중국 전제 왕권의 부패상이 극에 다다른 시기로 서구자본주의가 서서히 유입되고 있었다. 전대의 사상가들이 왕도적 민본주의를 주장한 반면 황종희는 정치의 핵심이 백성이며 정책 결정도 여론과 공론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이(明夷)는 64괘의 하나로 ‘밝은 태양이 땅 속에 빠져 들어간 상태’,즉 명청교체기를 기다리는 암흑시대를 상징한다.1736∼1795년 금서처분을 받기도 했다. 


Ⅱ. 생각확대하기

황종희 군주론
  기존의 군주제에 대한 비판이 드러난 글이다 지은이는 옛날의 태평성대에는 군주가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았으나, 지금의 군주는 백성과 땅을 자기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어 자기중심으로 생각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백성이 주인이며 군주가 손님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견해에서 근대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니 백성들은 그를 원망하고 탓하며 몰아낼 궁리를 하게 된다. 이 글은 군주의 직분이 어디에 그쳐야 하는지를 잘 알게 하는 일종의 ‘정치론’ 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한 처음에는 사람은 각기 자기중심이었고, 사람은 각기 이기적이었다. 천하에 공공의 이익이 있어도 이것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고, 천하에 공공의 해(害)가 있어도 이것을 없애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때에 어떤 사람이 나와서 자기 한 사람의 이익을 이익으로 삼지 않고 천하로 하여 그 이익을 받게 하고 자기 한 사람의 해를 해로 생각하지 않고 천하로 하여 그 해를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노고(勞苦)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의 노고의 천갑절 만갑절이 되었을 것이다. 무릇 천갑절 만갑절의 노고를 하면서도 자기가 그 이해(利害)를 받지 않는다면 필연코 천하 사람들의 인정으로는 그런 지위에 놓일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옛 군주로서 그 지위를 면하여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허유(許由)와 무광(務光) 이 그런 사람이다. 또한 그 지위를 받았으나 선양(禪讓)으로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떠난 사람은 요순(堯舜)이다. 처음에는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받은 후에 물러나지 못한 사람은 우(禹)이다. 어찌 옛날 사람이라고 다를 바가 있겠는가. 안일(安逸) 을 좋아하고 노고(勞苦)를 싫어하는 것은 또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보통의 마음인 것 같다.
  후세의 군주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천하의 이해(利害)의 권한을 다 자기의 손 안에 두 고 있다. 그리고 내가 천하의 이익을 모두 차지하고, 반면에 천하의 해(害)는 모두 남에 게 돌린다고 하여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천하의 사람들이 감히 자기중심으로 행세하거나,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의 대사(大私)를 위하여 이것을 천하의 대공(大公)이라고 꾸민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다가도, 얼마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천하를 막대한 재산이라고 보고 그것을 자손에게 전하여 무궁토록 이어받게 한다.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내가 이루어 놓은 재산, 곧 천하는 중형(仲兄)이 이룬 것과 어느 것이 더 많은가”라고 말한 것은, 그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무의식중에 넘쳐서 입 밖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옛날에는 천하가 주인(主人)이라면 군주가 객(客)이어서, 군주가 일생 동안 힘쓴 일은 천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가 객이 되어 무릇 천하가 어디든지 안녕(安寧)을 얻지 못 하는 것은 군주 때문이다. 그리하여 군주가 아직 천하를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천하사람 들의 간이나 뇌를 마구 무찌르고 독(毒)들게 하며, 천하의 자녀를 이산(離散)시켜서 자기 한 사람의 재산을 늘리고도 한 번도 처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본래 자손을 위하여 창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군주가 이미 천하를 얻은 후에는 천하 사람들의 골수를 두들겨 쪼개고 천하의 자녀를 이산(離散)시켜서 자기 한 사람의 음탕한 즐거움에 바치게 하고 그것들을 당연한 짓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은 내 재산에서 나온 이식(利息)”이라고 한다. 그러니 천하에 큰 해를 끼치는 것은 군주뿐이다. 만일 군주가 없다면, 사람들은 각기 자기중심이 될 수 있고 각기 자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오호라, 어찌 군주를 둔 까닭이 본래 이와 같았을 것인가.
  옛날에 천하의 사람은 그 군주를 친애(親愛)로써 받들어 아버지에 비기고, 하늘에 견주 었다. 그것은 참으로 지나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천하의 사람은 그 군주를 원망하고 미워 하며 원수와 같이 생각하고 독부(獨夫)라고 부른다. 그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학자들은 용렬하게 군신의 의(義)는 천지(天地)의 사이에 빠져나갈 데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걸왕(桀王)이나 주왕(紂王)과 같은 폭군조차도 또한 탕왕(場王)이나 무왕(武王)이 주멸(誅滅)할 것이 아니었다고 하며, 함부로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황당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만 가지 성(姓)을 가진 억만의 사람들이 파멸(破滅)하여 피투성이가 된 모습은 저 썩은 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어찌하여 넓은 천지 그 많은 사람 속에서, 다만 그 천자의 일인일성(一人一姓)만을 두둔할 것인가.
  무왕은 성인이고 맹자의 말은 성인의 말이다. 그리하여 후세의 군주는 아버지와 같고 하늘과 같다는 공명(空名)으로 사람들이 군주의 지위를 엿보는 것을 금(禁)하려고 하는 자는, 모두 그 성인의 말을 불편하게 느껴서 『맹자(孟子)』를 폐지하여 과거(科擧)의 과목(科目) 에서 제외하기에 이르렀다. 어찌 어리석은 학자들에게서 그 근원이 시작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후세의 군주가 이 재산을 보유하여 영원히 전하고 그 재산을 사유(私有)하는 일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미 천하를 재산이라고 생각하니 사람들이 이 재산을 얻으려고 하는 생각은 어느 누가 군주와 같지 않겠는가. 끈으로 단단히 묶어놓고 자물쇠로 꼭 채워 놓아도, 천하에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무리가 많다. 이것을 한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이겨낼 수는 없다. 멀면 몇 대(代) 사이에, 가까우면 자신의 당대에 피나는 파멸이 그 자손에게 나타난다. 옛 사람은 대대로 제왕의 가문에 태어나지 않기를 원했다. 명(明)의 마지막 황제 의종 (毅宗)은 공주에게, “네가 왜 우리 가문에 태어났는가”라고 말하였다. 어찌 비통하지 않은 말인가. 창업시(創業時)를 회상한다면 그 천하를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져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군주로서의 직분이 분명하면 요순시대처럼 사람들은 선양(禪讓) 할 수가 있었다. 허유(許由)나 무광(務光)이 속세를 떠났던 것이 아니다. 반면에 군주로서의 직분(職分) 이 분명치 않으면 시정(市井)의 사람들이 다 탐낼 수 있다. 허유나 무광 같은 사람이 후세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아 그 이름을 들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군주의 직분을 분명히 하기는 어렵지만, 잠깐의 음탕한 즐거움과 무궁한 비애(悲哀)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
(『明夷待訪錄』 第一, “原君(君主論)”)


Ⅲ. 생각 정리하기

마키아벨리 군주론
  “잔인함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은 군주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계속해서 잔인함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설령, 조금씩 혜택을 준다 해도 그것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술수이지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군주, 즉 국가 지도자의 현실적인 통치 방식과 지도자로서의 자세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정치학의 고전이다. 여기에는 윤리적 덕목만을 강조하여 군주로서의 실질적 힘과 국가 통치의 이념을 상실한 군주에 대한 강한 비판과 더불어 군주가 처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처세술이 논리 정연하게 담겨 있다. 『군주론』에는 ‘군주는 그의 시민을 결속시키고 충성을 바치게끔 하기 위해서는 잔혹하다는 악평을 조금도 개의해서는 안 된다.’‘군주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받는 쪽이 훨씬 안전하다.’‘군주는 여우의 간지와 사자의 용맹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군주론』은 군주의 국가 통치 방략을 논하면서 정치를 감싸고 있던 윤리적 허구성을 날카롭게 폭로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덕치주의는 현실성이 없고, 좀 더 구체적인 정치적 힘을 갖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재가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물리적 폭력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치자의 도덕성을 강조했던 이전 강의의 주장들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내용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다. 즉 요.순 시대를 모범으로 삼은 공자와 윤리적 덕목을 강조했던 인물들은 사회가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하고 또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던 반면에, 마키아벨리는 사회의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군주라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다. 결국 윤리적 정치질서를 강조했던 부류나, 강한 권력을 부르짖었던 마키아벨리 모두 사회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달랐을 뿐, 바람직한 사회 건설을 위한다는 목표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가토클레스와 기타의 사람들이 배반과 잔인한 행동을 무수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에서 오랫동안 평안하게 살 수 있었고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으며 동료시민에 의한 모반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른 많은 지배자들은 그들의 잔인성 때문에 위험한 전시는 말할 나위도 없고 평화시에도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였음은 무슨 까닭일까? 이 결과는, 잔인함이 선용되었는가에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만일 악에 대해서도 훌륭하게라고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러한 잔인성이 훌륭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자기 보존의 필요에서 한번은 그것을 행사하더라도 그 후는 이것에 집착하지 않고 피지배자의 이익에로 변경하는 한에서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한번 악용된 잔인성은 처음에는 작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첫째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은 아가토클레스의 경우처럼 신과 인간의 호의에 의해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으로 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둘째 방법에 의해서는 그들 자신을 유지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나라를 빼앗을 경우, 찬탈자는 그가 가하지 않으면 안 될 가해행위를 날마다 되풀이하지 않도록 한 번의 타격으로 마치게끔 해야 하고, 이 가해행위의 중지로 민심을 안정시키며,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서 민심을 얻도록 하는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겁에 의해서나 잘못된 헌책에 따라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사람은 항상 칼을 빼들고 있어야 하고, 그의 신하들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신하들도 계속적이고 부단한 새로움을 위해 긴장하기 때문에 군주에게 신뢰감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가해행위는 단번에 취해져야만 하며 그로 인한 나쁜 향기가 희미하면 사람들의 노여움도 작게 할 수 있다. 혜택은 사람들이 보다 충분히 맛보게끔 조금씩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군주는 행운이나 악운의 변화가 그의 행동을 바꾸게끔 하는 일이 없도록 신하들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일의 역경으로 인해 그의 행동을 바꿀 필요가 생겼을 때는 가해행위에 의뢰하려 해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지고 만다. 이러한 때 어떤 자비를 베풀면 그것은 소용없이 버려지는 것으로 간주되고 그것에 의해 아무런 감사도 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군주론』-
 
아가토클레스 (agathokles, bc 361~bc 289) 
헬레니즘시대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비천한 도공(陶工)의 아들로 출생하여 bc 333년 부호인 다마스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bc 325년 이후 민주파의 지도자가 되어 과두파(寡頭派)를 없애려다가 추방되었고, bc 317년 용병을 거느리고 다시 시라쿠사로 귀환하여 참주가 되었다. 참주가 되어 빈민구제책을 실시하고 육해군을 증강, 강국책(强國策)을 써서 시칠리아의 각 도시를 시라쿠사의 세력하에 두고 카르타고와 전쟁을 일으켰다. bc 310년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카르타고를 공격, 승리를 거둔 후 bc 308년 시라쿠사로 귀환하여 bc 304년 왕위에 올랐다. 만년에는 육친간에 불화가 계속되어 손자에게 독살되었다.
 
군주론의 핵심
  군주론의 군주국, 특히 신흥군주의 통치방법. 군주와 군대의 관계 군주가 추구해야 할 행위의 준칙 군주에 대한 호소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군주론의 핵심이자 마키아벨리즘의 정수는 제 18장 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킬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군주국 종류와 형성과정
  역사상 오늘날까지 인간을 다스린, 또는 아직 다스리고 있는 국가나 주권 집단은 공화국 아니면 군주국의 어느 하나였다. 군주국이란 지배자의 혈통을 계승한 자가 오랜 시일에 걸쳐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세습군주국과 새로이 탄생한 군주국들로 나눌 수 있다. 새로운 군주국으로서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스포르차가는 원래 용병대장의 집안이다. 프란체스코는 베네치아와 내통하여 군주를 쓰러뜨리고 그 자리에 자기가 올랐다.)가 통치하기 시작한 밀라노와 같은 전연 새로운 국가와, 에스파냐 국왕이 현재 통치하고 있는 나폴리 왕국과 같이 한 군주의 원래의 세습영토에 수족과 같이 통합돼 버리는 새로운 국가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얻어진 영토에는 군주제도하에 사는 것이 몸에 밴 곳과 또는 자유스러운 생활(봉건  군주하에서 보다 자유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던 공화제의 도시국가들을 가리킨다.)에 익숙한 곳이 있다. 그리고 이 영토를 얻는 방법에는 타국의 무력을 이용하는 것과 자기 무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운수에 따를 때와 노력 여하에 좌우될 때도 있는 것이다.
 
세습군주국
  혈통이 옳은 군주의 지배하에 있던 세습군주국이 새로운 군주국보다 다스리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 이유로는, 전자의 경우에는 통치에 있어 조상이 행한 정책을 충실히 지키고 동시에 불의의 하고에 적절히 대처하기만 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만 지킨다면 뜻하지 않은 강력한 세력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기기 전에는, 군주는 평범한 능력만 가지고서도 국가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강력한 자에게 국가를 빼앗기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침략자에게 조그마한 불운이 있을 경우, 다시 그 국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실례로서 이탈라아의 페라라 공(페라라 영주였던 에스테가의 에르콜레 1세를 가리킨다. 그는 베네치아에 패했으나 후에 다시 그 자리를 되찾는다.)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세습적인 지배자의 후계자가 아니었던들 1484년에 있었던 베네치아군의 공격이나 1510년에 있었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였을 것이다.
  정통의 군주는 민중을 귀찮게 할 이유도 필요성도 없기에 민중에 의해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하며, 상식 밖의 비행을 범하지 않는 한 미움 받을 이유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당연히 호감을 받게 된다. 또한 혈통이 오래 될수록 혁신의 동기도 그 생각도 멀어져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변혁은 반드시 또 다른 하나의 변화를 초해하는 화군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복합형 군주국
  그러나 새로이 형성된 군주국에는 여러 난점이 따르게 마련이다. 먼저 전혀 새로운 군주국은 아니나 신.구 영토를 합치면 복합형이라 부를 수 있는 나라의 수족 부분에 해당하는 새로운 군주국의 예인데,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혁은 모든 신생 군주국이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발생적 난점으로부터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난점 중 가장 큰 것은 민중의 생활이 향상되리라 믿고 지배자를 갈아치우려는 것이며, 이러한 신념 아래 손에 무기를 들고 지배자에 맞서게 된다.
  그러나 민중은 그들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먼저보다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을 경험으로써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또 하나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원인은 새로이 군주가 되려는 자가 부하들의 난폭함에 의해, 또한 점령 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가해 행위로 인하여 민중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정복자는 정복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고, 또한 그를 지원하여 모여든 친지까지도 당초의 약속대로 대우해 주기 힘들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고 은혜를 입은 그들에게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군사적으로 월등히 강력한 군주라도 어느 지역을 침입할 때에는 그곳 주민의 지원을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킬 것인가.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나 신의를 지키려다보면 군주가 곤란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처신해야 하다. 특히 새로운 운명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서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여우는 이리에게 공격당할 수 있고, 사자는 인간이 만든 올가미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이리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사자의 위엄과 올가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여우의 지혜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묘사하는 군주의 모습은 반인 반수가 되어 인간과 짐승을 함께 부릴 수 있어야 하며, 그 이상적인 모습을 여우와 사자의 두 역할을 하는 군주의 모습에서 찾았다. 또한 군주의 신뢰성 유지방법에 대해 사려 깊은 군주는 자기의 이익에 위배되면서까지 신뢰를 유지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또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경우 설사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 변명을 하는 군주는 실패한다. 인간은 극히 단순하여 현재의 필요한 것에 늘 대응하고자 한다. 남을 속이는 자는 속아 넘어가는 상대를 찾게 마련이라면서 자연스런 결과로 군주에 대해 타인과 약속은 언제나 회의적이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와 홉스와의 비교
  홉스가 처한 상황(종교전쟁과 내란)은 마키아벨리와 거의 유사했으며, 그들이 내놓은 대안 역시 비슷하다. 홉스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급선무라고 본 것과 마키아벨리가 일단 “국가 그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은 같다. 그리고 홉스가 “국가의 목적은 개인의 안전이다”마키아벨리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공화정의 최대가치를 “시민의 자유 보장”에 두었다는 사실과 완전히 일치한다. 게다가 두 사람 “국가 그 자체의 존속”을 상당히 강조함으로서, 권력국가사상이 아니냐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쟁상태”에서 일단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마키아벨리즘의 현대적 의의
  그람시는 군주론이 “체계적인 논술이라기보다는 정치이념과 정치과학이 극적인 형태의 신화 속에 혼합되어 있는 생동적인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군주론을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지향하는 하나의 집단의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줌에 있어, 길게 꼬여가는 논술이나 행동방식의 원칙이나 기준에 대한 현학적인 분류에 의존하지 않은 책“으로 파악한다. 또한 마키아벨리를 국가와 권력의 본질에 대해 국가와 권력의 본질을 신비주의나 관념론에 파묻힘이 없이 명쾌하게 기술한 사상가로 높이 평가한다.
  국가가 법과 자연으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마키아벨리)는 어떤 국가가 민족국가가 되기에 충분할 만큼 지속되고 강력해지려면 어떻게 탄생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는 법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며, 모든 국가의 형성에 필수불가결한 무장력의 언어로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종교를 활용해야 하는 종교 없는 정치의 언어로, 도덕적이어 하나 도덕적이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 정치의 언어로, 증오를 물리쳐야 하나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정치의 언어로 말합니다. 그는 계급들 간의 투쟁의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권리와 법과 도덕은 적절한 종속적인 지위에 놓습니다.
-알튀세/김석민 역, 마키아벨리의 고독, 새길, 1992, 236쪽.


Ⅳ. 논제 찾아보기

1. 옛날의 군주와 오늘(황종희 당대)의 군주는 어떤 점이 다른지에 대해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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