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경북 안동·영양군 편
문학기행/경북 안동·영양군 편
  • 이재인
  • 승인 2007.03.0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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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그냥 선비가 아니었네"
 

▲ 이문열 생가 전경

『고개』의 무대 청도 운문산 고개
오영수 선생의 단편 가운데 주옥같은 작품이 많다. 그 가운데에 가장 소설적인 배경과 인과응보를 능숙하게 처리한 작품으로 『고개』가 있다.
이 소설의 무대는 경북 청도의 운문산 고개이다. 필자가 20세에 읽은 소설의 감동 때문에 40년이 지난 후에 운문산 골짜기를 더듬게 되었다.
대구에서 대학 때의 문학친구인 문인수 시인을 만났다. 그와 함께 동행했던 정숙 시인. 이렇게 우리는 『고개』의 배경인 운문산으로 가는데 동의했다.
택시를 불렀다. 가다가 쉬고 또 가다가 쉬었다. 하냥 깊고 깊은 운문산은 쉬이 가슴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골짜기를 넘어 휴게실에 들렸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는 순간 내 시야에 시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것은 그 시인이 내가 잘 아는 분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구 경북지역에서도 시도 좋고 사람 좋은 김연대 시인이었다. 김연대 시인의 아주 좋은 시 한편이 액자에 끼워져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목이 「상인일기」였다. 전문을 옮겨보기로 하자.
 
하늘에 해가 없는 날이라해도
나의 점포는 문이 열려져 있어야한다.
하늘에 별이 없는 날이라해도
나의 장부에는 매상이 있어야한다.
메두기 이마에 앉아서라도 전은 펴야한다.
강물이라도 잡히고
달빛이라도 베어 팔아야한다.
일이 없으면 별이라도 세고
구구단이라도 외어야한다.
손톱 끝에 자라나는 황금의 톱날을
무료히 썰어내고 앉았다면
옷을 벗어야한다
옷을 벗고 힘이라도 팔아야한다
힘을 팔지 못하면 혼이라도 팔아야한다.
상인은 오직 팔아야하는 사람
팔아서 세상을 유익하게 해야하는 사람
그러지 못하면 가게 문에다가
묘지라고 써 붙여야한다.
나는 김연대 시인의 시를 다 읽고 난 후에 운문산을 참배한 후 홀로 김연대 시인이 살고 있다는 산속마을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정했었다.


▲ 소설가 이문열(좌)과 시인 김연대(우)

 
오지에 살고 있는 김연대 시인을 찾아
그것이 봄날 같은 겨울 오늘이다. 나는 안동에 살고 있는 그에게 시외전화를 걸었다.
그는 나의 방문계획에 대뜸 고생스러운데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상대방을 섬기는 마음의 뜻을 알고 있는 나는 이 시인의 시와 삶을 천착해 보고 싶었다.
그 시의 깊이와 높이와 중량을 분석하고 통합하는 게 내 직업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처럼 좋은 시인과 대면하고 하룻밤 같이 밀착 연구한다는 것은 나에게 행운이다.
그가 불러준 대로 수첩에다 주소를 적었다. 말은 안동시지만 여기는 시도, 군도 아닌 하늘아래 가장 높고도 깊은(?) 골짜기라고 했다.
세상의 논리로서 이해되지 않는 높고도 깊다니 도대체 거기가 어디인지 찾아 나서기로 했다.
공식적인 주소가 안동시 길안면 대곡리 782의 1이라했다.
나는 대충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다. 그미에서 안동가는 지름길 천평으로 들어섰다.
안동을 지나 안동시 안동대학교 앞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나자 나의 어눌한 지리정보에 기사는 혼란스러워 했다. 개인택시기사로서 나 같은 지리 설명은 기네스감이라고 했다. 손님에게 2만5천원 받은 탓으로 칭찬도 비평도 아닌 알쏭달쏭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부락 이름도 모르고 그냥 청송가는 길가에서 대곡리 팻말이 4킬로미터라고 씌어 있는 골짜기라고 했으니 당연하고도 당연한 기네스감이리라.
나는 택시를 타고 청송가는 국도를 몇 번씩 헤집고 다니다가 결국은 길안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친절한 면서기는
“김연대씨라면 그 시쓰는 사람이지요? 산속에 기와집 짓고 사는…….”
나는 그가 가르쳐 준대로 다시 택시를 돌렸다. 기사는 그제서야 알만한 것 같이 말했다.
“한티고개 오지마을인데 거길 뭣 하러 가슈?”
나는 그가 외딴 오르막 비탈길로 들어서자 괜히 불안해졌다. 안동시였다는데 왜 이런 비탈길로 끌고 가는 것인가? 자동차가 다닌 흔적이 별로 없는 시멘트 포장길인데 겨우 1차선 반 정도였다.
나는 택시기사가 혹시나 강도로 돌변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한티재를 넘어서자 그 깊은 골짜기에 마을의 몇 집이 나타났다.
그리고 옛날에 백시멘트를 파냈던 광산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맨살로 드러냈다.
“여기가 옛날 백시멘트 생산지였지요.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는 산골이지만도…….”
택시는 급경사로 내려왔다. 이 마을이 왜 여기에서 안주하게 되었는가를 가늠할 수가 있었다. 임해댐이 막히기 전에는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을 것 같이 직감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대로 대곡리 한티마을은 산으로 막히고 물론 막혀버린 오지 중에 오지마을이었다.
나를 맞이한 김연대시인은 700평 대지위에 그림 같은 전통 한옥을 지어 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삽니다. 오시느라 수고했소이다…….”
나는 집을 찾아오느라 고생한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예부터 신선을 만나는데 고생 없이 만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내 일찍이 한학으로 숙달하고 있었다.
“내가 이 한티재를 만들 때…….”
그는 이 대목에서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기자나 작가에게는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요?”
내가 묻자 그는 달갑잖게 입을 열었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기로 이름난 시인이었다. 자기 자랑이나 오만같은 것이 없는 시인이었다. 그런 그가 나의 채근에 그만 비밀을 발설하기 시작했다.
“69년도에 제가 실업자였을 때 대구에 나가 있는데 이 한티를 오가는 고갯길을 닦는다는 소리가 들렸지요. 그때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달구지 길 닦는데 헌금을 했지요……. 이 서낭목이 그때 달구지가 다니기 시작했지요…….”
4킬로나 되는 고갯길에 달구지가 다닌다는 말도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눈이 오면 길이 막히는 19세기를 사는 그런 마을이 대곡리이다.
김연대 시인은 그러한 대곡리를 떠나 대구에 나갔다. 냉동학원 강사로 4년, 사무기기 가게를 18년간 경영하면서 딸 셋과 아들 하나를 키웠다. 지금은 시집 장가들 다 보내고 4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살기로 작정하고 이곳에 사년 전에 집을 짓고 신선답게 살고 있었다.
그의 착한 심성을 비추는 듯 하늘의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한 산골에서 소쩍새 울음과 배꽃 환한 동산을 거닐고 있다.


조지훈 오일도 이문열의 고향
이튿날 나는 김연대 시인을 따라 영양 석보를 향해 차를 몰았다.
김주영 작가가 젊은 시절 살면서 근무했다던 전매서를 휘익 돌아보곤 이문열 생가로 향했다.
두들마을 전통가옥의 즐비한 마을에서 이문열 작가의 생가를 점찍는 김연대 시인의 말이 걸작이었다.
“왕대밭에 왕대 나는 법이지요……. 자! 보시지요? 이 마을 풍광과 강물을…….”
나는 사진기를 연신 눌러대면서 영양군의 살뜰한 ‘옛 전통 가꾸기’ 운동에 찬사를 보냈다.
무너지고 훼손된 한옥을 손질하고 복원하여 관광 상품으로 만든 지혜가 어제 오늘에 급조된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예부터 「영남학파」라는 우수한 인재를 배출한 인프라 구축이 오늘의 영양을 키웠고 이문열, 이용태시장과 같은 인물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문열 그의 가문은 그가 자라와 성장한 것만큼의 부피로 우리 작가들에게 어필해 왔다. 넓고 큰 또 하나의 우주. 그것은 이문열 대가 댁의 모습이었다.
그의 훌륭한 작품들은 그의 부친이나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익히고 배운 결정체가 아닌가 싶었다.
높은 언덕에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던 이문열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살아나는 듯했다. 그의 사람 좋고 글 좋다는 게 그냥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흐뭇했다.
대개의 유명한 분들의 고택이나 종가를 돌아보곤 허탈해지는 게 의례히 겪는 일인데 이 두들마을에서의 흐뭇함이 도서관에서 철야하고 나선 그 기분이었다.
이밖에 영양에는 조지훈시비와 그의 생가 및 오일도가 태어난 곳이다. 조지훈은 시인이요 국문학자로 본관은 한양으로,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현영의 4남매 중 둘째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록집』, 『승무』, 『봉황수』,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앞』에서 등 많은 시집을 남겼다.
생가는 영양에서 20분 거리에 있고 주실마을 입구에는 「빛을 찾아가는 길」이라 새겨진 조지훈의 시비가 세워져있으며, 생가 인근에는 조지훈이 어렸을 때 수학했던 월록서당과 여러 문화재가 있다.
또 감천마을은 낙안 오 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조선문단 4호에 「한가람 백사장에서」로 문단에 등단하여 1935년 사재를 털어 최초의 시 전문지 「시원」을 창간하여 5호까지 발간한 시인 오일도가 태어난 마을이다.
당시 「시원」은 시문학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마을입구 31번 국도변에 시비가 세워져있고 생가 앞 하천절벽에는 천연기념물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면서 자생하고 있다.


 

▲ 이재인(인장박물관장·경기대 국문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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