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으로 들여다본 『광염소나타』
정신분석학으로 들여다본 『광염소나타』
  • 강인해
  • 승인 2010.05.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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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술 논설위원
Ⅰ. 생각해보기

예술은 문제적 개인으로부터 시작 된다
 
김동인(金東仁 1900-1951) 호는 금동(琴童). 평양 출생. 어려서 일본 유학 명치학원을 거쳐서,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수학. 1919년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함께 <창조(創造)>를 창간함. 이광수 등의 계몽주의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근대 소설인 사실주의를 표방함. 1926년 사업에 실패하여 생계를 위한 문필 활동을 함. 그의 작품 세계는 이광수의 계몽주주의에 맞선 사실주의, 신경향파 내지는 프로문학에 맞선 예술지상주의로 순수 문학 운동 전개로 묶어질 수 있다. 소설의 예술성을 주장하여 다양한 문학 사조와 수법을 구사하였다.
 
줄거리 구성
 
 

 
등장 인물

 


 
이해와 감상
김동인이 유미주의에 관심을 기울여 그 세계를 소설화한 작품은 이 『광염 소나타』와 『광화사』가 대표적이다. 『배따라기』도 같은 계열에 들지만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

두 작품 모두 예술 세계를 소재로 한 것으로 하나는 음악가, 하나는 화가의 삶을 다루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 추구한 음악의 세계는 광기(狂氣)라고 하는 예술적 정열에 있다. 김동인이 추구한 미(美)는 조화와 선(善)과는 거리가 먼, 일상성에서 크게 벗어난 일탈 치미와 관련이 있다. 과히 악마주의적이라 할 만큼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보여 주는데, 김동인이 규정한 미는, 반이성주의(反理性主義), 반규범(反規範), 반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방탕과 파괴, 음습함, 기괴함 따위의 부조화된 광기의 속성을 지닌다. 실제로 김동인은 한때 유미주의에 취해 생활 자체를 유미주의적으로 실천하기도 했다. 그것은 방탕이었는데, 이 파괴적 삶은 그가 유미주의의 본질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유미주의 소설은 이런 형태에 대한 찬사로 일관되어 있다. 


▲ 김동인  소설가
유미주의 또는 예술지상주의는 창작의 목적이 오로지 미적 세계의 창조에 주어져 있다. 따라서 주제 의식이 개입될 여지가 적고, 그런 특이한 미의 구현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주의라는 보다 넓은 개념에 수렴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술의 세계는 형식의 창조에 주안점이 주어진다. 유미주의 소설은 그 형식에 있어서 특징이 발휘된다. 그러나 김동인은 형식(소설의 구조, 표현)보다는 인물 자체를 유미주의자로 설정하고 구현했다고 하는 한계를 가진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백성수는 천재로 그려졌다. 유미주의자는 섬세하고 특이한 미의 발현자인 이상, 천재로 그려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 천재성은 범상(凡常)에 적응할 수 없고,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을 지향한다. 백성수는 신이(神異)한 존재로 설정된다. 그는 기존의 음악 양식을 거부한다. 각고 끝에 작곡한 작품은 참답고 힘 있는 음악이 못 되었던 것이다. 즉흥적이고 선이 굵으며, 야성으로 충일된 음악만이 참된 예술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다른 삶의 조건은 파괴되어도 좋다는 입장이다.

힘 있는 예술, 선이 굵은 예술, 야성으로 충일된 예술― 우리는 이것을 기다린 지 오랬습니다. 그럴 때에 백성수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말이지, 백성수의 그 새 예술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문화를 영구히 빛낼 보물입니다. 우리의 문화의 기념탑입니다. 방화? 살인? 변변치 않은 집 개, 변변치 않은 사람 개는, 그의 예술의 하나가 산출되는 데 희생하라면 결코 아깝지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적어도 우리 예술가에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집의 개나 사람 개 따위는 이 위대한 예술의 탄생을 희생되어도 좋다는 서술자의 마지막 말은 김동인의 유미주의를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예술은 기성의 파괴, 윤리의 말살, 기존 관념의 철저한 박멸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악마적 야수성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광포성(狂暴性)을 키워 가야 한다. 담배 가게에 불을 지르고는 그 미칠 듯 타 오로는 불길에서 영감을 얻고 암울하고 신비로우며 정열적인 소나타를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백성수가 그 불길 속에서 받는 미감(美感)은 물론 전율하는 광포함이다.

그 여자가 죽었다는 것은 제게도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 밤, 혼자 몰래 그 여자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칠팔 시간 전에 묻어 놓은 그의 무덤의 흙을 파서 그의 시체를 꺼내어 놓았습니다. 

 푸르른 달빛 아래 누워 있는 아름다운 그의 모양은 과연 선녀와 같았습니다. 가볍게 눈을 닫고 있는 창백한 얼굴, 곧은 콧날, 풀어 헤친 검은 머리…… 아무 표정도 없는 고요한 얼굴은 더욱 처연(悽然)함을 도왔습니다. 이것을 정신이 없이 들여다보고 있다가 저는 갑자기 흥분되어 …… 아아, 선생님, 저는 이 아래를 쓸 용기가 없습니다. 재판소의 조서를 보시면 저절로 알으실 것이올시다.

그 날 밤에 된 것이 <사령(死靈)>이었습니다. 

이런 일탈성은 심화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무덤을 파헤치는 기묘하고 무서운 행동으로, 시체를 강간하는 변태적 행동으로 나아가면 살인도 불사한다. 그것은 모두 예술혼의 구현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이처럼 김동인의 유미주의는 반사회적, 반인륜적 ,반조화성을 기저로 한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관은 충동성에 의한 즉흥적인 것을 존중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오랫동안의 노력 끝에 정제된 예술은 참다운 것이 될 수 없으며, 분노와 광기의 공포스런 전율에 의한 그로테스크한 세계만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무의식으로 표출되는 광포함, 그것을 내재하고 있는 자가 천재라면, 그의 예술관에서는 천재만이 예술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이런 태도가 곧 그의 예술지상주의였던 셈이다. 따라서 예술은 사회적 질서에서는 벗어나야 하고, 보편적 정서와는 동떨어져야 하며, 그 세계가 기괴하면 할수록 우수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백성수의 광기 어린 예술혼을 그리면서 그가 그렇게 된 원인을 두 가지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모성 본능이요, 또 하나는 가난이다. 이 둘은 맞물려 서술되고 있지만, 하나는 개인적 조건이요, 하나는 사회적 조건이다. 개인적 조건 때문이라면, 이 제약에 의해 왜곡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그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자연스럽고, 사회적 조건이라면, 물적 조건이 삶을 결정한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서술되어야 어울린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내세우고서도 유미주의의 삶에 집중해 버렸기 때문에 구성이 탄탄하지 못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모성 고착(mother fixation)이라는 심리주의적인 세계에도 김동인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유미주의에 대한 집착과 자부심은 서술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액자 형식을 빌린 논평을 통해 작가는 서술자의 목소리로 유미주의 찬양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현대 소설의 가장 큰 요소의 하나인 묘사를 생략하고, 집약적 서술로 일관해 버리는 태도에서도 김동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저명한 음악 평론가 k씨와 사회 교화자가 담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사회 교화자의 말은 몇 개의 대답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k가 들려 주는 이야기이거나 그가 보여 주는 백성수의 편지로 되어 있다. 그런 만큼 음악 평론가인 k의 예술관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 k는 유미주의 예술관을 대표하며, 사회 교화자는 사회적 가치를 대변한다. k는 물론 작가와 거리가 밀착되어 있는 인물로 김동인 자신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이야기의 출발은 ‘기회’라는 의미에 대한 것에서 시작한다. 이 말은 ‘계기’라는 의미로 바꾸어도 좋은데, 백성수가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지만, 기묘한 계기에 의해 도둑질을 했고,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고, 그에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큼 복수심이 이글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성수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던 광기가 예술로 발현되었으므로, 백성수의 사회적 일탈 행동을 두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동인의 시각은 분명한 모습을 가지고 드러난다. 그는 사회적 일탈 행동 덕에 참다운 예술이 생겼다면, 참다운 예술을 지키기 위해 일탈 행동은 전제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극단의 유미주의는 반도덕적인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는 예술지상주의인 것이다.
                
Ⅱ. 생각확대하기

프로이드 무의식· id·자아·초자아

1) 무의식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을 통해 현대 심리학의 태동을 이끈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인간정신을 의식(consciousness)과 무의식 (unconsciousness)의 계층적 구조로 보고, 정신분석학의 구조 모델인 본능(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를 제시하였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감정·사고·의지작용을 정의하면서, 무의식에 의한 사고와 이해할 수 없는 의지작용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무의식은 욕구충동과 고유한 표현 양식 그리고 모든 곳에 작용하지 않는 독특한 심리 기제를 지니고 있는 정신의 특별한 영역”을 가리킨다. 프로이드는 자신의 여러 저작을 통해 무의식을 생물학용어로 본능이 위치한 자리, 물리학용어로 에너지의 경제적 방출, 심리학용어로 즉각적으로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이거나 억압된 것으로 설명했다. 프로이드는 치료는 무의식을 의식적인 것으로 변모시킬 때 효과적이다”라고 주장하면서도, 무의식은 일시적으로 잠재되어 있지만 영원히 무의식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2) 이드(id)  
자아·초자아(超自我)와 함께 정신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 또는 한 영역. 정신분석 용어. 이것은 본능적 에너지, 리비도(libido)의 저장고이며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함을 피하는 쾌감원리(快感原理)만을 따른다. 여기서는 도덕도 선악(善惡)도 없으며 논리적인 사고도 작용하지 않는다. 시간관념도 없고 무의식적이다. 어린아기의 정신은 거의 전부 이드로 이루어졌는데, 뒤에 이 이드의 일부가 외계와 접촉 변화하여 자아가 형성된다. 프로이드는 이드를 독일어로 에스(es)라고 하였다. es는 영어의 it에 해당하는 말인데, 이것을 영역(英譯)할 때 자아(自我)를 에고(ego)라고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므로 it에 해당하는 라틴어 이드를 사용하기도 한다.
 
3) 자아(自我, ego)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 이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 따라서 그것은 그때그때의 사고 ·감정 ·의지의 각 작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성과 동일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자아의 구체적 내용은 그때그때의 각 작용의 내용과 관계없는 것은 아니며, 그것들에 반성의 눈을 돌림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자아란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철학상 자아의 자각은 ‘너 자신을 알라’를 가르친 소크라테스에게서 비롯되는데, 자아의 문제가 철학의 주제로 된 것은 인간의 주체성이 확립되는 근세 이후의 일이다. r.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에 의하여 ‘생각하는 나’를 정신이라 부르고, 이를 항상적 실체로서 확립했으나, d.흄 등의 영국 경험론은 그때그때의 감각 ·감정을 떠나서 자아는 없고 그것들의 총체가 바로 자아일 따름이라고 하여 자아의 정신적 실체성을 부인하였다.

이리하여 자아의 정신적 실체성을 주장하는 합리론의 입장과, 그것의 감각적 다양성을 주장하는 경험론의 입장이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에 인식론의 관점에서 해결을 부여한 것이 칸트이다. 칸트는 자아의 실체성은 이를 부인하지만, 그러나 인식의 가능성의 근거는 경험적 자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적 표상(表象)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지 않으면 안되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統覺), 즉 선험적(先驗的) 자아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독일 관념론의 j.g.피히테는 이 선험적 자아를 형이상학적으로 절대화하여 전실재(全實在)를 포괄하는 절대적 자아를 구상하였다. 

현대철학에 있어, 자아의 문제는 이러한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관점보다 오히려 윤리적 ·인간학적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사르트르는 그의 철학 논문 <자아의 초월>(1934)에서 모든 표상에 ‘나는 생각한다’가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 칸트적인 선험적 자아를 부인하면서 『존재와 무(無)』(1943)에서는 ‘나’의 존재가 타자(他者)에 의하여 근저로부터 위협받고 있음에 언급하고, 자아는 그 존재의 근저에 있어 대타적(對他的) 존재라고 주장한다. 또한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너’라고 부르는 타자(他者)와의 만남과 응답에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아에 대해서 극히 명확한 의의를 부여하고 임상심리학 및 일반심리학에서 채용하고 있다. 즉, 인간의 원시적 비인격적 무의식충동(이드)의 욕구가 그 결과로서 발생하는 긴장을 벗어나고 고(苦)를 피하려고 하는 쾌원리(快原理)를 좇아 작용할 때, 의식의 표면에 발생하는 것이 자아이다. 자아란 원시적 충동과 현실의 외계와의 중개자이다. 또한 사회적 규범에 따라 주어지는 상벌 ·금지 등에 의하여 개인의 내부에 정사(正邪)의 의식이 생기고 그것이 자아를 비판한다. 이 부분을 초자아(超自我)라고 한다. 즉 인격은 ‘이드’와 ‘자아’와 ‘초자아’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4) 초자아(超自我, superego)
개인의 정신 내에서 사회나 이상의 측면과 관계있는 것. 정신분석의 인격이론(人格理論) 중 구조론(構造論)에서 인격의 사회가치·양심·이상(理想)의 영역. 상위자아(上位自我)라고도 한다. 구조론에서는 인격을 하부(下部)의 충동 ·본능영역의 이드(id)와 의식적 주체(意識的主體)의 중핵(中核)이 되는 자아, 그리고 초자아의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초자아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다. 초자아의 기능으로서는 개인의 행동에 대해 내부로부터 선악(善惡)의 판단을 내려서 그 행동을 촉진하거나 제약하거나 한다. 또 행동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기도 하고, ‘나쁜’ 행동을 하였을 경우 죄악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착한’ 행동을 하였을 경우 자존심을 높여 주기도 한다. 유유아기(乳幼兒期)에는 선악이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판단에 맡겨지지만, 이러한 가치는 점차 본인 자신 속으로 도입되어 간다. 이와 같은 형성과정에 관하여 s.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기(oedipus期:性의 역할이 문제가 되는 시기로서 小兒性器期) 이후라고 생각하였으나, 클라인 등은 생후(生後) 반년 정도에서 형성된다고 생각하였다.

5) 리비도(libido)
성충동을 의미하는 말로, 융이나 프로이등 등의 연구에서 나타난다.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로 일반적으로는 개인이 개인적 발달이나 개성화 과정에서 에서 겪게 되는 자생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 단어를 제창한 프로이드는 리비도를 정신의 거대한 무의식적 구조인 이드(id)에 포함된 본능적인 에너지나 힘으로 정의했다. 프로이드는 이러한 리비도의 충동이 초자아(superego)로 대표되는 정신 내부의 문명화된 행동의 관습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자아는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리비도를 억제하며, 이는 개인에게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져 채워지지 않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분산시키는 자기방어가 나타나게 된다. 지나친 자기방어는 신경증(노이로제)을 유발할 수 있다. 정신분석의 1차적인 목표는 이드의 충동을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으로 그 둘을 융합시켜 환자가 자기방어에 덜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6) 포트fort 다da 놀이
프로이드는 손자가 태어난 지 l년 반이 되었을 때 손자가 습관적으로 장난감을 감추거나 버리는 것을 관찰 했다. 이 놀이를 통해 아이는 “오-오-오-오”소리를 냈다. 프로이드는 이 소리를 독일어 포트fort, 즉 ‘사라졌다’로 해석하여 아이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과 장난감이 ‘사라지는’놀이는 같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날 내 의견과 해석에 확신을 갖게 되는 관찰을 했다. 아이는 줄이 매여 있는 나무 실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실패를 마루 위로 끌고 다니거나 마차로 사용하지 않고, 능숙하게 커튼이 쳐진 침대 너머로 던졌다. 실패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아이는 “오-오-오-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는 다시 실을 당겨 실패를 밖으로 끌어냈다. 실패가 나타나자 아이는 “다da(저기 있다)”라는 감탄하는 소리를 질렀다. 이는 사라졌다 다시 돌아오는 완벽한 놀이였다. 사람들은 대체로 아이가 이 놀이에서 지치지 않고 반복하는 첫 번째 행위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더 큰 쾌락은 두 번째 행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예를 통해 프로이드는 부재의 재현, 즉 실제적인 사건과 느낌을 대체하는 보상놀이를 통해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되는 고통스런 체험을 어떻게 훌륭하게 극복해 가는지 보여 주었다. 이 포트(사라졌다) / 다(저기 있다) 놀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아이의 훌륭한 문화적 성취는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는 본능의 포기(본능에 대한 흡족함의 포기)와 관련이 있다. 아이는 자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대상을 사라지게 했다 다시 돌아오게 하는 놀이를 하여,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 얻은 것이다.

반복되는 놀이는 어머니의 존재와 비존재를 경험을 통해 인식하게 하고 그로부터 오는 고통을 극복해 가는 동시에 더 큰 쾌락을 만들어 내는 재현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간다. 무의식에서 발생되는 욕망은 문자 그대로 의식이 아니다. 

무의식에서 발생되는 욕망은 여러 형태의 표현을 통해서 눈에 드러난다. 예를 들면 실수로 말을 잘못 하는 일, 실없이 하는 말장난, 꿈, 좋거나 언짢은 조짐, 놀이, 텍스트 등이 그것이다. 정신분석치료는 환자가 말을 할 때 언어가 무의식에 대한 흔적을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처럼 언어에 대한 자세하고 빈틈이 없는 관심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말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상태로 바꾸어 주체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끊임없이 주체의 분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현대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발화주체와 발화주어 사이에 벌어진 틈을 통해 주체의 분열을 정의한다. “이는 현재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는 것인지를 알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내개 말하는, 즉 자기 자신과 동일한 인물인지 알려고 하는 질문이다”고 라캉은 말한다(라캉). 주체는 존재(“나는 있다”)의 희생에 의해 나타난 언어를 통해 의미(“나는 말한다”)를 얻는다.
 
Ⅲ. 생각정리하기

라캉의 거울단계와 욕망 이론
욕망(欲望, desire) - 무엇을 하거나 가지고 싶어 간절히 바라고 원함, 또는 그 마음. 프로이드는 [쾌락원리를 넘어서]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을 다시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소쉬르의 언어관을 적용하여 구조주의(종래는 후기구조주의)이론을 만든다.

1. 자크라캉의 인간 성장 의식분석-거울단계
1) 상상계

① 라캉의 인간 주체에 대한 학설로 6-18개월의 단계로 상상계라고 정의했다.
② 3살이 되면 언어를 배우는 단계, 즉 사회로 진입하는 시기로 정의했다.
③ 인간은 주어지고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며 이를 거부한다.
④ 인간이 주체로 어떻게 형성되는가의 기본적인 개념이 거울단계이다.

상상계인 거울단계는 아이와 엄마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며 거울을 통해 자기를 바라봄만 있는 단계이다. 
 
그러나 상징계로 접어들면 파편화 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파편 된 조각들을 통일  시키기 위해 결핍을 느끼게 되며 상상계로 돌아가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예는 모빌로 동일화 단계를 이루려고 하는 아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여름의 낮잠). 이 집중의 단계를 통해 조각난 자아를 동일화 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인간은 주체로 성장한다. 상상의 단계에서는 엄마와 한 몸으로 보며 한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고민이 없는 단계이지만 이 단계가 깨지면서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신만 알며 고착된다.(나르키시스/나르시시즘). 엄마=아기는 동일체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한다.

2) 상징계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으로 엄마로부터 떨어지는 단계로 언어,사회,법 아버지의 권위가 개입하는 시기이다. 이는 자기소외의 단계이며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타인의 눈길 아래로 들어가는 단계이다. (방에 혼자 있을 때- 사회속에 있을 때 타인의 눈길 속에 살아간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은 뒤틀려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행하면서 균열, 쪼개진, 금간 관계는 상처를 받는다.(심하면 정신병에 걸린다) 때문에 인간은 정상과 비정상을 같이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다 환자이다(불안 번민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인간은 아픈 존재이다.

3) 주체는 결핍, 욕망은 환유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 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울리며 반가워한다. 아이는 그 속에 비친 모습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 단계를 ‘거울단계(mirror stage)’라고 하여 주체의 형성에 원천이 되는 모형으로 제시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는 없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총체적이고도 완전한 것으로 가정 한다. 이 형태는 정신분석 용어로 이상적 자아라 불리우는데 타자에 의해 보여짐을 모르는 객관화되기 전의 ‘나’에 해 당된다. 이 ‘보여짐’을 모르고 ‘바라봄’만이 있는 단계를 거울단계라 하며 거울단계는 ‘상상계(the imaginary)’라고도 하는데 이 단계는 ‘상징계(the symbolic)’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언어의 세계요,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이 거울단계는 사라지거나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상상계는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의 동일시 혹은 원초적인 질투가 벌이는 극적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다(double 관계).
 
2. 욕망의 구조
주체는 대상에게 욕망을 느낀다. 그것이 자신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만 얻으면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얻어도 욕망은 여전히 남는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렇다면 대상은 실재처럼 보였지만 허구이다.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이다.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이다. 여전히 욕망이 남아 그 다음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실재계이다. 그리고 이때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대타자이고 허구화된 대상이 소타자이다. 그래서 $◇a라는 욕망의 공식이 나온다.

$ : 주체

a : 오브제object(대상/객체) 아a, 혹은 프티 아petit a(오트르 autre/작은 他者) - 욕망의 대상 ‘오브제 아’는 '사랑받고 싶은 나 자신'이다

$는 주체이고 a(오브제 아, 혹은 프티아)는 주체로 하여 금 욕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허구적 대상이다. 마름모꼴 ◇는 대상이 결코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결핍이다. 실재계에 나타나는 틈새요, 구멍이다. 이 말을 바꾸면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처럼 보이는 대상, 즉 대체가 가능 하리라 믿는 단계가 압축이고 은유이다. 그러나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시 또 그 다음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치로 환유이다. 그러므로 욕망 역시 언어처럼, 무의식처럼,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쾌락원리를 넘어서' 에서 죽음만이 욕망을 충족시킬 뿐이라고 하여 이미 이것을 암시했다.
 
3. 『광염소나타』
『광염소나타』와 『광화사』는 탐미주의적 경향과 액자소설이다. 또한 예술가의 남다른 버릇과 천재성 속에 숨은 광기에 초점을 둔 예술가 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 백성수는 방화,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는 그다운 예술적 창작활동을 전개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인물의 심리적 근거가 어떤 바탕에 기대고 있고, 어떤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백성수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천재적 음악성과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은 후천적인 ‘교양’으로 성장한 이중성격 인물로 표현 되어있다. 이것은 융의 인간의식 이분적과 비슷한 면이 있다.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의식의 페르소나(persona)는 무의식에 숨어들어 남의 눈에 착한 사람으로 비치기를 바라를 페르소나의 억압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즉 백성수는 교양의 틀이 작동하면 ‘점잖고 온화한 청년’의 페르소나가 억압하여 창작을 하지 못한다. 그가 자기의 숨은 예술의 천재성을 발휘하게 된 것은, 빈곤, 어머니의 병사, 감옥생활 등의 역경을 겪으면서 ‘교양’의 힘이 약화되고, 충동적인 방화로 나타난 그의 야성의 폭발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창작심리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예술의 ‘에너지와 부조리성과 그 신비한 능력’의 출발은 무의식이 요구하는 원초적 욕구인 이드(id)이며, 이를 억압하는 것이 초자아(super -ego)이다. 예술창작은 결국 이 후자를 파괴하여야만 가능해진다고 이해 할 수 있다. 원초적 ‘욕망’을 선천적 ‘야성’으로, 이를 억압하는 초자아를 ‘교양’으로 놓고 살펴보면 주인공이 방화, 살인 등을 통해 일시적으로 교양의 울타리를 벗어나 야성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순간, 예술창작의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광염소나타』는 미친 사람의 이야기나 예술지상주의만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에서 제시하는 일관된 심리적 흐름을 가지고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에 대한 대립을 통해 보편적 인간의식 이나 예술가들에게 공통된 창작심리의 한 부분을 알아볼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Ⅳ. 논제찾아보기
이 소설의 제목인 『광염소나타』의 '광염(狂炎)'이 의미하는 것을 쓰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분석하시오.
 
/ 황인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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