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점의 끝 어디쯤에 발생하는 환상
접점의 끝 어디쯤에 발생하는 환상
  • 이호
  • 승인 2010.04.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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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일곱 시 삼십 이분 코끼리 열차』
▲ 황정은 소설가  (사진제공: 문학동네)   © 독서신문

 
[독서신문] 황정은의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환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작품 속에서 인물은 세계와의 접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접점의 끝 어디쯤에서 환상이 발생한다. 환상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세계의 부조리를 이야기 한다. 이 때 환상이 소설 내 한 인물의 개인적 경험이라면 환상은 단지 어떤 주체의 ‘세계 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황정은은 이런 면에서 여타의 소설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이 작품에서 환상은 이상한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으레 그런 일이 된다.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는 광경을 이웃이 보았을 때, ‘어, 모자로 변해버렸네’가 아니라 이 광경은 ‘아이 교육에 좋지 않아’라며 반응하는 세계를 황정은은 천연덕스럽게 만들어낸다. 이 때 독자들은 개인적 경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런 세계 속에는 소외받고 상처입은 영혼들이,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연민하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황정은의 소설을 읽고 나면 먹먹한 무엇인가가 남게 된다. 그것은 짠한 슬픔이기도 하고 우리 일상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물론 숨막힐 정도의 슬픔은 아니다.
소설을 읽고 나면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한 번쯤 감싸 안아 주고 싶어진다. 담담하게 혹은 담담한 척 하면서 그녀는 문장을 나열한다.
 
슬픔, 상처를 감싸 안고 위로하는 방법으로 황정은은 환상을 택한다. 일상 속의 상처를 그녀는 일상이 아닌 것으로 위로한다. 하지만 환상이 일상이 아니라고 구분하는 것은 구태의연하다. 우리의 삶은 이런 꿈과 기대, 환상과 소망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황정은의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작명술도 언급해 두어야겠다. 재미있는 것은 『일곱시 삼십 이분 코끼리 열차』에는 같은 인물들이 각각의 단편에서 등장한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파씨’다. 실명인지 가명인지, 성별이 무엇인지, 나이나 취향은 알 수 없지만 매력적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파씨, 곡도, 기조씨와 체셔, 구야, 모두 소설에 걸맞는다. 그들의 이름은 덤덤한 문체와도 어울린다. 현실의 무게에 눌려 상처받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원동력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외롭고 소외된 인물을 꾸준히 그려낸다는 것,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짊어지고 가는 작가의 뒷모습은 등을 토닥여주고 싶을 만큼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비루하지만 혼잡스럽지 않게 소설을 형상화 해내는 재주가 돋보인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만의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고도가 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고도’란 영영 오지 않기 때문에 고도일 수도 있겠다.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자면 고도가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꼽자면 후자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문제적 개인’이다. 그것이 욕망의 차원이든, 병적인 차원이든, 이미지의 차원이든, 세상을 살면서 행복해 죽겠다는 사람을 소설이 그려내지는 않는다.

소설 속에는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독자와 소설 속의 인물이 만날 때 내면적 동요가 발생한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독서로 인해 한 개인이 좀 더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분노나 타인을 향한 적대감이 줄어드는 것을 체감으로 확인할 수 있다. 황정은의 소설을 읽는 동안 문학적 범위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애틋함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

 / 이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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