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몽상이다
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몽상이다
  • 이호
  • 승인 2010.04.16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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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유주의 『달로』
▲ 한유주 소설가 (사진제공: 문학과지성사)     © 독서신문

 
[독서신문] 한유주를 읽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란 어떤 무장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무장을 해제하는 일이다. 무장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의 질서다. 흔한 예로 한유주의 소설엔 인물, 사건, 배경이 뚜렷이 명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것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야기가 없는 소설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하는 이야기란 대체 어떤 이야기인가. 우리는 달, 이라는 추상으로 얼마만큼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달에 도달하는 여정을 어떤 식으로 그려낼 것인가.

바로 그 자리에서 한유주의 소설은 탄생한다. 이후 “달은 아마도 차가울 것이다”(「달로」, 8p), 라는 진술을 토대로 펼쳐지는 건 이야기가 아닌 몽상이다.

몽상을 구현해내는 것은 언어이지만, 그 언어엔 도통 질서가 없다. 몽상에서 출발한 언어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지시받지 않는다. 몽상은 언어를 부르고 언어는 다시 몽상을 부르고 어느 땐 사유를 호출하기도 한다. 이 몽상과 언어와 사유의 징검다리들은 마침내 우리를 달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 여정 속에서 우리가 저마다 다른 달을 목격하게 됨은 물론이다. 같은 달을 보며 다른 달을 품는 일.

한유주는 어느 인터뷰에서 특정 이야기 주체, 즉 화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적이 있다. 작품 속에 특정 화자를 상정함으로써 한 편의 이야기가 한 화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을 파시즘적 장치로 바라보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유주는 서사의 기승전결에도 반감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준다고 익히 믿고 있는) 어떤 짜임 속에 미감에 따라 이야기의 부위를 몰아넣는 것은 한유주의 말마따나, 쓰는 자의 야만인 것이다.

현대는 시간을 통제하고 전망한다. 현대에 오면 시간이라는 개념은 진보와 맞물린다. 우리는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이어야 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발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만 진보해야만 하는 강박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원래 시간의 본질이란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의 순서로 전개되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봐도 시간은 반복과 순환이란 메커니즘으로 흘러간다. 그녀는 현대의 속도에 멀미를 느낀다.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녀에겐 현대의 어떤 징후가 수록되어 있는 것인가?

m.캘리니쿠스에 의하면 현대성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시간으로, 객관적이고 사회적으로 측정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현대성 내지는 세속적 현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현대성을 비판하는 것이 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캘리니쿠스의 의견이다.

그는 사회적 현대성과 반대의 개념으로 미적 현대성을 들었으며, 이는 문화적 현대성이라는 개념과 동일시된다. (문화적 현대성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는데, 미적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데카당스, 포스트모더니즘, 키치가 있다. 한유주의 소설은 아방가르드와 데카당스 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한유주의 소설 곳곳에서 현대성을 야만으로 인식하고 절망하고 체념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보는 세상은 폭력과 죽음과 공포로 가득하다. 그녀의 소설에서 전쟁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도 이런 현대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과학의 발전과 진보의 개념, 휴머니즘 사상이 제1, 2차 세계대전을 발발하게 한 주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물어보자. 『달로』는 소설인가? 소설에 대한 시비인가? 한유주라는 작가의 등장이 갖는 의미는 전적으로 그녀의 글이 소설로서 받아들여졌다는 데 있겠다.

누군가는 그녀의 소설을 ‘차라리 시적이다’ 라고 평했는데 그녀는 문학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이같이 답했다. ‘소설과 시의 경계를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냐’고. 정치인의 연설문이라거나 어떤 가전제품의 사용설명서도 접하게 되는 맥락에 따라 시이거나 소설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마치 자신은 애초부터 그런 경계 따위 모조리 허물기로 작정이나 했다는 듯이. 한유주의 입지점은 바로 그녀가 인정을 얻어냈다는 점이다.

그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남은 과제는 ‘그녀가 자신의 스타일을 얼마만큼이나 합리화시킬 것이냐’이다. 한유주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소설은 왜 반드시 그래야만 하나요? 이런 식으로 쓰면 왜 안 되나요?”

 / 이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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