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 ①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 ①
  • 신금자
  • 승인 2010.03.1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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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상드     ©독서신문
[독서신문] 신금자 수필가
 
‘드메 신드롬(demers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年上女 - 年下男이 커플을 이루는 풍조를 뜻하는 이 말은 19세기 초 파리에 살던 청년 드메가 조르주 상드 등 연상의 여인에게만 사랑을 고백하고 다녔다는데서 유래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이제는 사회적 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드메 신드롬의 주인공 중 하나인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시인 뮈세와 음악가 쇼팽의 전성기를 이끈 여인이다. 그만큼 조르주 상드는 쇼팽을 알기 전부터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였다. 오늘날 자유분방한 성해방의 선각자로 재평가되고 있는 그녀는 항상 사랑에 목말라 했다. 그 때문인지 그녀가 사랑을 뿌리치고 헤어질 땐 매몰찼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헤픈 사랑에 비해 가식과 위선을 모르는 보헤미안적 이방인이기도 했다.

겉모습은 남장 여인이었으나 시인, 피아니스트, 조각가, 예술가들을 사랑할 때의 모습은 영락없는 여인이 아니었던가. 뮈세는 정신적으로 시름시름 앓은 것도 모자라 발작을 일으키고 그녀의 목을 조르는 등의 충격 속에서도 그 곁을 지켰고, 쇼팽은 만날 당시부터 폐병을 앓아 그의 요양과 각혈, 인근주민들의 퇴거명령에 도피하다시피하며 그를 간호했고 그런 쇼팽이 몇 주일씩 문을 걸어 잠그고 피아노를 두들겨대도 모성애적인 사랑으로 예술을 이해했다. 그녀는 그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소설도 완성했다. 불행히도 그녀의 문학사적 비중보다 사생활이 더 화제가 된 탓에 수많은 작품들이 서점이나 필독서 목록에서 빠진다는 사실이다. 필자로선 이 부분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녀의 탄생과 유년시절

그녀의 이름 조르주 상드는 연인이었던 ‘줄 상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본명은 오로르 뒤팽(aurore dupin)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폴란드 왕실의 후예였고 어머니는 파리 빈민굴 새장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실부인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녀의 나이 4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잖아도 천출인 그녀의 어머니를 집안에 들여놓은 것이 못마땅하던 상드의  할머니는 그 어머니 손에서 손녀가 자라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 참에 아예 그녀를 손녀의 양육에서 손을 떼게 하려고 상속금을 조금 쥐어주고 그녀의 어머니를 내쳤다. 그리고 상드는 중부 프랑스의 베리주 노앙에서 할머니가 키웠다.

그녀의 할머니는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덕분에 상드는 오르간, 클라비고트, 하프 등의 연주도 배웠고 그림, 라틴어, 희랍어, 역사, 수학 그 외 호머, 라신, 몰리에르 등의 작품들도 탐독할 수 있었다. 더불어 어머니 아버지 없는 아이답지 않게 티없이 맑은 아이로 자랐다. 또래 아이들과 노앙의 숲과 들판을 마구 뛰놀며 유년기를 보냈다. 16세 때는 수도원으로 가서 교육도 받았다. 수녀가 되고도 싶었다. 이에 눈치 빠른 할머니가 수도원에서 얼른 데려왔다. 그리고 노앙의 영지를 그녀에게 물려주었다.

이 때부터 그녀의 태도에 변화가 왔다. 남장을 즐겨하고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등,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애매한 취향으로 자유분방해졌다. 18세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홀로 된 상드는 파리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상드를 반기지 않았다. 시어머니 손에 자란 딸이었기에 그녀의 눈엔 딸의 행동과 모습에서 자꾸만 시어머니 이미지가 보인 모양이다. 어머니가 상드만 보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 더는 함께 지낼 수가 없었다. 
 
▲ 조르주 상드와 프레드릭 쇼팽의 초상 (외젠 들라크루아 作)     © 독서신문
 
혼자는 외로워 둘이 되다

바야흐로 혼자가 된 상드는 길거리를 방황하다 언젠가 알고 지낸 아버지의 친구 뒤프레시스 댁을 찾아갔다. 반가이 맞아준 덕분에 그 댁에 머물면서 음악회나 연극 등 모임에 나갈 수 있었다. 이 때 만난 청년이 카지밀 뒤드방 남작(baron casimir dudevant, 1804-1876)이다. 둘은 이내 가까워져 1823년 9월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뒤드방 남작은 사생아이긴 해도 아주 부자였고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그러나 어린 상드를 배려하기엔 아주 무례했다. 괜히 노앙 영지의 오래된 나무들을 베어버리는가 하면 꽃밭을 자기 멋대로 없애고 그녀의 오랜 친구인 늙은 개와 앵무새마저 죽였다. 그녀는 그의 이런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을 식혀주고자 책을 읽어주는 등,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그녀의 환멸은 점차 무관심으로 변하여 아들과 파리의 친지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그러자 그는 상드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그리고 상드는 거의 감시당하며 살았다.

이 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이란 자기희생에 불과할 뿐이야.” 그리고 요양을 핑계로 남편 곁을 떠나 파리에서 처녀시절 친구인 의학자 스테판(stephen)과 젊은 법률가 드 쎄즈를 만나 지내기도 했다. 이 무렵 상드는 딸 쏘랑쥬를 낳았다. 이런 사실을 남편이 곧 알게 되었다. 상드가 우정관계로 허락해달라고 정중히 요구하자 남편도 나름대로 여색을 즐기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요구를 별 무리없이 들어주었다.

그렇지만 상드는 여전히 무료하고 따분하여 어떤 해방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림과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어쩌랴, 그 문학마저 그녀를 또다시 사랑으로 이끌었다. 그녀 앞에 법학도 ‘줄 상드’(1811~1883)가 나타났다. 6살이나 연하인 그는 상드가 싫다는데도 애원하며 매달리자 그에게 사랑을 허락하고 말았다. 법학도인지 문학도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의 박식함에 그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토론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집 서랍정리를 하다가 “내가 죽은 후에 펴 보시오” 라고 적혀있는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다름 아닌 남편이 자기를 저주하고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수취인을 명기하지 않은 것은 누구든 이 사실을 보고 유포시켜달라는 취지 아니겠는가. 그거야 다분히 주관적이니 그렇다손치더라도 자기를 '타락한 여자'라는 대목에서 그녀는 분노를 느꼈다. 당장 남편에게 달려가 나에게 자유와 연금을 달라고 했다. 끝내자는 통고였다. 그리고 무작정 파리로 나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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