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사생아
이스탄불의 사생아
  • 독서신문
  • 승인 2009.12.29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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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라는 화장아래 가려진 ‘분열’의 민낯
[독서신문] 황정은 기자 = “피어싱이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코에 피어싱을 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어.”

젊은 시절, ‘원색의 미니스커트에 터질 듯한 가슴을 강조하는 꽉 끼는 블라우스와 반짝이는 나일론 스타킹에, 그 아찔한 하이힐까지 신는’ 작품의 등장인물 젤리하는 이렇게 말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과 더불어 터키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엘리프 샤팍의 작품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됐다. 터키에서 금기로 간주되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문제를 거론하며『이스탄불의 사생아』가 출간된 것.

이 작품은 민족의 모순과 얽히고설킨 관계의 상처 가운데 존재하는 두 여성을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개방적인 엄마 젤리하에게서 사생아로 태어난 터키인 아시야와 아르마니아계 미국인인 아마누쉬가 그 주인공으로, 이들의 태생을 통해 나타나듯 작가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두 민족, 터키와 아르마니아의 민족 문제를 화두로 내던지고 있다.

‘금기’라는 이름의 족쇄아래 자유롭지 못했던 ‘분열’과 ‘불안’의 모습을 거론한 작가는 수면아래 존재했던 그것들을 수면위로 건져 올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엘리프 샤팍은 이 소설이 출간되자 터키 정부로부터 ‘터키 모욕죄’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터키의 상처인 민족문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기소된 그녀는 결국 혐의에서 풀려났지만 이는 작가가 소설에서 제기한 문제가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얼마나 민감한 사안인지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이스탄불에서 살고 있는 열아홉살의 터키인 아시야 카잔지는 야생의 느낌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여성이다. 개방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엄마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길들여지지 않은 아시야는 ‘이스탄불의 사생아’로서 태초부터 존재의 불안을 안고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인 아마누쉬는 아시야의 외삼촌 무스타파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만난 로즈의 딸이다. 하지만 아마누쉬는 무스타파의 핏줄이 아니며 로즈가 전 남편 사이에서 얻은 존재다. 1915년 발생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사건을 마음에 두고 자란 아마누쉬는 어머니가 터키인 무스타파와 재혼한 것을 이유로 삼아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모님 몰래 이스탄불에 도차하게 된다.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불안’이다. 말 그대로 안정된 것이 없는 주인공들은 끊임없는 생의 역습 속에서 자신을 찾고자 노력하기도, 회피하기도 한다. 젤리하는 자신의 뱃속에 잉태된 아시야를 근절하기 위해 중절수술을 시도하지만 그녀 내부에 자리 잡고 있던 낙태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에너지로 인해 결국 뱃속의 아이는 그대로 자라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또한 아마누쉬의 어머니도 무스타파와 만남을 시작한 이유는 순수한 사랑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터키인 무스타파를 선택한 것은 하나의 복수였다. 그러나 뚜렷한 대상 없이 겨냥한 복수의 화살은 결국 그녀 자신과 아마누쉬에게 겨눠졌다. 다행히 그 화살은 누군가를 소멸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화합을 시도하는 하나의 도전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이 흘린 피는 의미가 있었다.

엘리프 샤팍은 소설 안의 모든 장치를 철두철미하게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다. ‘문화의 방주’ 안에서 민족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 모든 이질적인 것과 섞이지 않는 것을 넣고 있으며 그녀가 선택한 ‘이질적이고 섞이지 않는 것’들은 한편 가장 나약하고, 연약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작품은 총 18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그것의 부제는「계피」,「병아리 콩」,「구운 헤이즐넛」,「오렌지 껍질」,「말린 무화과」,「장미수」등으로 터키의 대표적인 디저트 ‘아슈레’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이다. 이슬람의 옛 전설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자 각 종교의 분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먹을거리들을 하나씩 내놓았는데 이것을 다 뒤섞어 만든 음식이 바로 아슈레인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 데 모여 새로운 결과물로 탄생하길 바라는 작가의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슈레는 연속성과 안정성의 상징이었다. 아무리 무서운 폭풍이 닥치더라도 그 후에 찾아올 좋은 날의 정수였다.”

다른 디저트와는 다르게 늘 ‘자기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가족을 위해서도 준비’된 아슈레는 항상 ‘대량으로 준비’된다. ‘생존과 유대, 풍요의 사징’인 큰 그릇에 담겨 이웃들과 함께 나눠 먹는 이 디저트에 작가의 모든 메시지가 함축돼있는 것이다.

터키의 상처인, 그래서 금기인 대학살문제를 거론하며 아직 씻지 않은 터키의 민낯을 공개한 엘리프 샤팍. 그녀의 이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소망이 가늘지만 명확하게, 엿보인다.
 
chloe@reader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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