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
  • 신금자
  • 승인 2009.11.1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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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금자[수필가·본지 편집위원]     ©독서신문
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 역사적으로 그녀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혹독했다. 검은 여인, 음모와 배신의 세기적 악녀, 등이 바로 그녀에 대한 평이었다. 이는 19세기 대중작가들이 그녀를 음모와 배신, 독살의 주인공으로 폄하해온 탓도 한몫했다. 그녀에 대한 이러한 평가가 근래에 들어 조금씩 바뀌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랄까.
 
카트린의 출생

카트린 드 메디치(1519~1589)는 유럽 문화의 중심이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든  15세기 말,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이자 정치가로서 권력의 절정기에 있던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카트린의 부모는 빈사 상태에서 헤매고 있었고 그녀 또한 병약하게 태어나 심신의 혼란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만만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마치 그녀 앞에 놓인 삶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고라도 하듯 말이다.
 
정부(情婦)가 있는 앙리 2세와의 정략결혼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지배권을 유지하려고 자기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자 종손녀인 카트린을 프랑수아 1세의 둘째아들 앙리에게 시집을 보낸다. 이 정략결혼이 카트린을 피렌체에서 음모와 적대감이 난무하는 프랑스 궁정 속으로 내몰았던 것에 다름 아니다. 왕족이 아닌 낯선 외국인의 어려움은 물론, 카트린이 프랑스로 오기 전부터 남편 앙리 2세에겐 20살 연상인 노르망디 법관의 아내 ‘디안 드 푸아티에’란 정부(情婦)가 있었다. 이 디안이 앙리의 총애를 믿고 왕비인 카트린을 우습게 알고 하대했으며 그 삼각관계에 놓인 카트린은 결혼 후 10년 동안 이유없이 아이가 없다가 그 후로 10명의 아이를 낳게 되었지만 앙리 2세가 죽기 전까지 자신의 아들들마저 디안에게 빼앗진 채 허울만 좋은 왕비로 숨죽여 지내야 했다. 

 이 인욕의 삶도 끝이 있었던가. 남편이 사고로 죽고 마침내 장남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르나 1년 만에 죽는다. 다시 차남인 샤를 9세가 갓 10살의 나이에 즉위하면서 카트린이 섭정 황태후로 등극하게 된다. 즉, 왕관과 더불어 프랑스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광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분쟁까지도 물려받았다. 바로 종교전쟁을 떠안았던 것이다. 종교 갈등의 골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모든 문제가 서로에 대한 비난과 비판으로 시작되고 반란과 형벌로 이어졌으며 이는 내란도 불사했다.
 
종교전쟁의 시대

16세기 유럽은 루터가 개신교를 주창한 이후, 프랑스는 로마가톨릭교도와 칼맹주의를 따르는 개신교도(위그노)의 대립이 격한 때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발표된 것이 ‘낭트 칙령’ 이다. 카트린이 사위 앙리 4세가 브레타뉴의 낭트에서 1598년 4월 13일 공표를 해 '낭트 칙령'이라 명명되었다.
 그렇다면 낭트칙령 이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26년 전인 1572년 파리에서 2만여 명의 신교도가 구교도 귀족에 의해 대량 학살당한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 사건이 있었다. 당시 위그노파 제후의 결혼식 참석차 들렀던 지방의 위그노들까지 뜻하지 않은 참변을 당하는 바람에 민심은 참으로 흉흉했다. 어언 30여 년 동안을 신교도와 구교도는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살육전을 벌였다.

결국 프랑스의 왕조 교체를 바라던 신교도의 정신적 지주였던 영국은 위그노를,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가톨릭의 구교도를 각각 지원해 국제적인 분쟁까지 일어났다. 문제는 이 참변의 배후에 어린 왕 ‘샤를 9세’ 의 뒤에서 수렴 청정하던 카트린 드 메디치의 묵인, 또는 공모가 있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일었다. 사실 금융가문의 카트린을 상인의 딸로 격하시키며 무시하고 적대시하던 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이탈리아 출신의 사악한 악녀가 한 짓이라고 혐의를 씌우기에 열을 올렸다.
 
 이 파란의 시대중심에 서게 된 그녀, 무슨 수로 요동치지 않을 수 있으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잖은가. 어느 쪽도 섣불리 손을 들어 줄 수 없을 만큼 국가가 신·구교로 팽팽히 맞선 대치상황인지라 그녀는 신·구교도들 사이에서 어느 쪽도 기울지 않는 관용의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곪을대로 곪은 뿌리 깊은 종교적 갈등은 피해갈 수 없었으며, 수차례의 내전을 비롯해 프랑스 종교전쟁 중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성 바르톨로뮤 축일 대학살'을 일으킨 배후 조종이란 주범으로 몰리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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