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봉윤정경(伽山逢尹正卿)
邂逅伽倻寺 行裝帶雨痕(해후가야사 행장대우흔)
相逢方一笑 相對却忘言(상봉방일소 상대각망언)
‘벗과 가야산에 있는 가야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길을 나선다. 가야산으로 들어서자 변함없는 마음으로 서 있는 푸른 소나무들이 길 양편에서 반긴다. 벗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져 발길을 잡는다. 옷이 흠뻑 젖었다. 흠뻑 젖은 발걸음으로 산문(山門)에 들어서자 벗 또한 흠뻑 젖은 몸으로 들어선다. 옷도 행장(行裝)도 젖었지만 반가운 마음으로 두 손을 잡고 활짝 웃는다. 오래된 벗을 만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두 손만 꼬옥 잡고 흔들 뿐이다.’- 金長生(김장생, 1548-1631)
우리는 많은 약속 속에 살아간다. 오랜 벗을 만나는 즐거운 약속이 있는가 하면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는 즐겁지 못한 약속이 있다. 학부형 요청에 의해 멀리 영종도에 있는 학생 집을 직접 방문하여 진학 상담을 위한 약속을 잡았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갈매기를 벗 삼아 월미도 선착장을 이용하여 영종도에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서둘렀다. 잠시 후 영종도에 도착해 지도와 지형을 대조해 가며 약속된 집에 당도해보니 약속한 당사자는 보이지 않고 객들만 가득하다. 학생 또한 없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허둥대며 뛰어왔건만 상대는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파기하고 말았다. 즐거운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서운함만 담고 돌아와야 했다.
시원하게 트인 신공항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약속이라는 단어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오래된 벗과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호젓한 가야사에서 벗을 만난 김장생의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과 오늘일이 겹쳐지면서 얼마 전 버스 승강장을 한동안 유심히 관찰했던 일이 생각났다. 버스 승강장을 관찰한 결과 어떤 승강장은 줄을 잘 서 있고 어떤 승강장은 줄을 서지 않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줄을 잘 서는 승강장은 버스가 승강장 표지판에 정확하게 서는 승강장이었고, 줄을 서지 않고 우왕좌왕하는 승강장은 들쭉날쭉 아무 곳이나 버스가 서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곳은 버스가 들쭉날쭉 섰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면서 차를 쫓아 다녀야 했던 것이다.
‘혼란’은 예측 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서로 ‘약속’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예측 할 수 없고, 예측 할 수 없으니 줄을 서서 기다릴 수 없고, 약속이 되어 있지 않으니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약속’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혼란’이 오며 ‘혼란’은 사회발전을 아득한 옛날로 후퇴시키고 만다. 기본적인 ‘줄서기’를 잘하기 위해선 운전하는 사람과 줄을 서는 사람과의 정확한 약속이 필요 한 것이다. 어느 한 쪽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장생의 「가산봉윤정경」과 같이 오래된 벗을 만나는 정겨움 가득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 조순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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