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체(筆體)와 글쓰기
필체(筆體)와 글쓰기
  • 이재인
  • 승인 2009.09.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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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인교수     ©독서신문
글씨를 남이 알아보기 어렵게 쓴 사람의 필체를 우리는 대체로 악필(惡筆)로 규정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일반화되면서부터 악필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컴퓨터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간단한 메모에서부터 편지봉투, 송금의뢰서 등 아직도 우리 주변의 문화는 친필을 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글씨 자획을 생략되게 썼거나 혼란스럽게 흘려 쓰면 해독하느라 시간과 노고를 들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글씨체에는 그 사람만의 표식, 그 사람의 정신자세와 내면이 드러난다. 이것은 비단 서예가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다. 글씨를 잘 못쓰더라도 또박또박 눌러쓴 글자에는 그 사람의 정성과 혼, 대세계적인 태도 같은 것이 드러나 있게 마련이다.

한국의 문인들 가운데 최고의 악필로 유명했던 사람은 평론가이자 중앙대 교수였던 백철(白鐵)선생이다. 백철 선생의 원고는 지렁이 지나간 것처럼 펜을 굴려 썼기 때문에 출판사 직원들이나 문선공들이 애를 먹었던 것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 분의 글씨는 거칠고 조악했지만 그 분의 논지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일반화된 시대에도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것을 고집하는 분들이 여럿 있다. 특히 소설가 박범신 선생은 소설을 쓸 때 아직도 원고지를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으로 쓰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손으로 눌러쓰는 글씨에 어떤 영혼을 담으려는 노력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리라. 그래서 우리의 선인들은 서권기(書卷氣)라 하여 글씨만 보고서도 그 사람의 공부의 수준과 내공을 짐작했던 것이다.

글쓰기란 언제나 자기 무지와의 조우이다. 글을 쓰려고 할 때, 그 글의 종류가 무엇이든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자기 무지의 한계와 만나게 마련이다. 이때 그 무지를 기피하려는 심리를 백지공포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쓰기가 바로 그 무(지)와 대면하여 자기가 모르는 것의 경계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정신.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기본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 때 자기의 무지, 아직-아무 것도 없음 앞에서 정좌를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글을 짓는 것이야말로 글쓰기가 가지는 창조의 고통이자 희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컴퓨터가 일반화되어 필체의 중요성이 예전만 같아지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직접 눌러쓰는 글씨의 품새에는 아직 그 사람의 정신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한 만큼 우리는 어린 세대에게도 글씨쓰기의 의미를 가르치고 여전히 필체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 이재인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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