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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인들 가운데 최고의 악필로 유명했던 사람은 평론가이자 중앙대 교수였던 백철(白鐵)선생이다. 백철 선생의 원고는 지렁이 지나간 것처럼 펜을 굴려 썼기 때문에 출판사 직원들이나 문선공들이 애를 먹었던 것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 분의 글씨는 거칠고 조악했지만 그 분의 논지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일반화된 시대에도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것을 고집하는 분들이 여럿 있다. 특히 소설가 박범신 선생은 소설을 쓸 때 아직도 원고지를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으로 쓰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손으로 눌러쓰는 글씨에 어떤 영혼을 담으려는 노력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리라. 그래서 우리의 선인들은 서권기(書卷氣)라 하여 글씨만 보고서도 그 사람의 공부의 수준과 내공을 짐작했던 것이다.
글쓰기란 언제나 자기 무지와의 조우이다. 글을 쓰려고 할 때, 그 글의 종류가 무엇이든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자기 무지의 한계와 만나게 마련이다. 이때 그 무지를 기피하려는 심리를 백지공포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쓰기가 바로 그 무(지)와 대면하여 자기가 모르는 것의 경계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정신.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기본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 때 자기의 무지, 아직-아무 것도 없음 앞에서 정좌를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글을 짓는 것이야말로 글쓰기가 가지는 창조의 고통이자 희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컴퓨터가 일반화되어 필체의 중요성이 예전만 같아지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직접 눌러쓰는 글씨의 품새에는 아직 그 사람의 정신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한 만큼 우리는 어린 세대에게도 글씨쓰기의 의미를 가르치고 여전히 필체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 이재인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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