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을 정치․종교로 통일한 카를 대제
서유럽을 정치․종교로 통일한 카를 대제
  • 황인술
  • 승인 2009.09.28 13: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샤를 마뉴 (Charlemagne ; 742.4.2~814.1.28)
[독서신문] 논술 이야기 = 샤를 마뉴 (charlemagne ; 742.4.2~814.1.28)
 
▲ 샤를 마뉴     ©독서신문
생애

카롤링거왕조 제2대 프랑크 국왕(재위 768~814)으로서 카를대제 또는 카롤루스대제라고도 한다. 카를 대제는 피핀 3세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왕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두 아들에게 분할되나 동생이 죽자 단일통치자가 되었다.

카를 대제는 피핀의 원정에 늘 동행했다. 이러한 젊은 시절 경험은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게 하였고 외부 세력에 대해서는 강인하게 맞섰으며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영토를 넓히려하였다. 심지어 혈연관계를 따지지 않고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한이 있더라도 냉정하게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몇 차례 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서유럽을 정치적으로 통일하였다. 중앙집권 지배를 도입하면서도 지방봉건제도를 적극 활용했고 로마 교황의 요청으로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였다.
 
또한 북쪽 게르만인(人)들은 그때까지도 아리우스주의를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로 신봉하고 있었지만 카를 대제가 프랑켄을 통치하면서 아리우스주의가 사라지는 등 서유럽을 로마 ․ 가톨릭교회 중심으로 통일하고 로마 고전문화의 부활을 장려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카를 대제는 772년부터 804년까지 작센족 정복, 바이에른 족 토벌, 롬바르드 통치, 아바르족과 벤드족 등을 정복하였다. 778년 여름 카를 대제가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최고 사령관 흐루오들란트 백작이 전사하면서 참패한다. 이 전투에서 전설로 남은 카를 대제 조카인 롤랑은 목숨을 걸고 퇴각하는 아군을 엄호하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아나팔을 힘차게 불어 카를 대제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 전투 이후 프랑스 최초 서사시이자 무훈시인 「롤랑의 노래」는 걸작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 카를대제 낙관(落款)     © 독서신문
카를대제 낙관(落款)  서로마 제국 영토를 회복한 프랑크 왕국 카를 대제는 신앙심이 깊었으며 정복지 마다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799년 5월 교황이었던 레오 3세가 반대파들의 습격에 샤를마뉴 궁전으로 피신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카를 대제는 800년 11월에 교황과 함께 로마에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800년 성탄절 미사 때 교황 레오 3세는 로마 교회 수호자라 칭하고 카를 대제에게 중세 처음으로 황제 대관식을 열어 “그대는 신의 종으로 신을 위협하는 악을 물리쳤음에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임명한다”며 황제의 왕관을 씌워 주었다. 이 사건은 레오 3세와 카를 대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카를 대제는 로마 정통성을 부여 받았고 로마 교회는 이민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세력을 찾음과 동시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세력을 가질 수 있었다. 결국 서로마에서 새로운 황제가 등장하자 자연스럽게 동로마(비잔틴 제국)와 갈등을 겪게 된다. 이로 인해 1054년 교회는 분열되고 만다. 서유럽을 정치·종교로 통일하고 서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낸 카를 대제는 814년 1월 28일에 사망한다.
 
카를 대제가 유럽에 물려준 봉건주의
카를 대제는 새로운 점령지역을 봉건주의 제도로 통치했다. 즉 각 부족의 독립된 문화를  인정하는 한편 중앙집권에 의한 통치를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여  중세 여러 봉건 국가들이 발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봉건주의와 함께 기사도를 스페인에게 전해 이달고(스페인 세습 귀족) 인물 유형을 만들어내게 하였다.
 
▲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지도     © 독서신문


이달고(hidalgo)
기사(騎士)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 이달고 신분은 왕으로부터 직접 수여되거나 특권으로 세습된다. 이 말은 12세기경에 나타난 'hijo de algo'에서 'hijodalgo'로, 다시 줄여서 'hidalgo'가 되었다. 당시 이 신분은 하급귀족으로 큰 사업가나 지방유지(有志)와 구별하기 위하여 쓰여진 말인데, 그들은 면세(免稅)의 특권을 누렸다.
 
아리우스파(arianism)
4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성직자 아리우스가 주장한 신학이다. 아리우스는 ‘성자’ 예수는 창조된 존재이며,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는 반(反)삼위일체 성격의 주장을 했는데,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초기 기독교 분파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해 교회에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하였으며, 니케아신경에 ‘성자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라는 신앙고백 내용을 넣었다. 이후 아리우스주의는 북방 게르만족의 민족 신앙이 되었으며, 여호와의 증인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프랑스 무훈시 중 최고·최대의 걸작이다. 작자는 분명하지 않으며, 성립 연대는 1098년부터 110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어(中世語) 10음절 시구 4천2행으로 되었다. 12세기 후반의 옥스퍼드 고사본(古寫本)에 실제 노래로 불리던 이 시의 순수한 모습이 전한다. 이 서사시의 특징은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한 인물의 설명에 있다. 내용은 778년 8월 15일 에스파냐 원정에서 돌아오던 샤를마뉴 대제(大帝)의 후위부대가 피레네 산속 롱스포에서 바스크인(人)의 기습으로 전멸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기독교에 봉사하는 봉건적 가치를 구현하는 십자군 운동의 정신을 미화하는 영웅에 대한 시이다. 치밀한 구성과 기품 있고 힘찬 문체로 황제와 신에게 봉사하는 봉건 프랑스의 무사도(武士道)를 찬양하고, 대장 롤랑의 용감함, 막료(幕僚) 올리비에의 슬기, 간신(奸臣) 가늘롱의 원한을 대립시키면서 사라센 대군을 적군으로 설정, 회교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승리를 노래하였다. 한편 작자·연대·성립과정·구성요소 등에 관해서는 각국의 연구자들 사이에 아직도 이설이 많다.
 
내용 읽어보기
롤랑이 대답하였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말라. 여기에서 비겁하게 굴면 그것은 무사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말고 차라리 적진에 쳐들어가자.”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자 롤랑은 사자와 같은 목소리로 프랑스 대장들을 불러 모은 뒤 올리비에에게 말했다.
“동지여! 아무 말 하지 말라, 대왕이 우리에게 2만의 정예 병사를 골라 주셨으니, 이 중에 비겁한 자는 하나도 없다. 주를 위하여 죽음의 길에 뛰어들어 (중략) 피와 살을 잃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다. 그대는 이 창으로 돌진하라. 나는 대왕이 내려주신 이 칼로 공격하리라. 내가 전사하면 이 칼을 얻는 자는 그것을 훌륭한 무사의 유품이라고 할 것이다.”
 
생각해 보기
카를 대제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 부족이 시행하던 부족법전을 성문화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였고 중요한 행정조직으로 장관인(그라프, graf;伯) 그라프샤프트 제도를 시행했다. 그라프샤프트는 로마시대 말기의 행정구인 키비타스를 모방한 것으로, 그라프는 도시 방위를 맡은 군대의 지휘관이었으나 뒤에 행정적·사법적 기능도 겸하게 되었다. 메로빙거왕조 초기에는 국왕이 임명권을 장악하였으나, 7세기 초에 해당지역 귀족이 임명권을 독점해 영주화(領主化)되어 갔다. 이러한 제도는 지방봉건제도로 활용되며, 중세 여러 봉건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세 봉건제도와 현재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