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강을 건너 군사독재를 이룩하다
루비콘강을 건너 군사독재를 이룩하다
  • 황인술
  • 승인 2009.09.1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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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7.12~BC 44.3.15)
▲ 황인술 교수 / 논설위원     © 독서신문

[독서신문]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7.12~bc 44.3.15) 
 
생애
서양에서 커다란 영향을 남긴 사람 중 하나로 시저라고도 한다. 로마 공화정 말기 전통귀족 집안인 가이우스와 아우렐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전통귀족 출신이었으나, 조상 중에 유명한 정치가는 없다. 기원전 60년 정적 카틸리나를 물리치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동맹(三頭同盟)을 맺어 집정관(執政官, 콘술consul)이 된다.

  명연설가 ․ 철학가 ․ 정치이론가로 평민파보다는 벌족파에 가까웠던 카이사르는 민중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민심 파악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는 등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민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민중에 입장에선 정책 운영을 착실하게 수행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된 카이사르는 커다란 명성을 얻어 대정치가로 발돋움 한다. 아시아라는 속주(屬州)에서 장교로 근무했으며, bc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 지방장관이 된다. 재임 중 갈리아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갈리아를 평정할 뿐만 아니라 라인강 건너에 있는 게르만족을 두 차례 쳐들어가며, 영국해협 건너 브리튼섬도 두 차례 쳐들어갔다. bc 52년 베르킨게토릭스이 주도한 갈리아인 대반란이 일어나자 진압하여 갈리아전쟁을 끝낸다. 긴 시간 동안 치러온 갈리아전쟁은 카이사르에게 경제와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 카이사르 석상-파리 루부르박물관     © 독서신문

 
bc 53년 크라수스가 쓰러지자 제1회 3두정치는 와해되고 원로원 보수파 지지를 받던 폼페이우스와 관계도 순조롭지 못하게 되며 서로 충돌하게 된다.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복귀하라는 원로원 결정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루비콘강(갈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을 건너(bc 49년 1월 10일) 로마로 진격,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고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한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을 부여받지만 원로원으로부터 권력 집중에 대해 의심을 받게 된다. 그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왕보다 딕타토르(dictator, 독재자)로 남고 싶었다. 결국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칼에 가슴이 찔려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날 숨을 거두고 만다(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 업적으로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 달력 개정(율리우스력) 등이 있다. 또한 카이사르는 도시국가에서 벗어나 세계제국이 된 로마의 지배와 통치는 강력한 한 사람의 통치에 의해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군사독재에 의한 효율성은 양자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세워진 제정(帝政)에서 확인된다.
 
평민파와 벌족파
평민파(populares)는 고대 로마공화정 말기 묵은 조직나 제도·관습·방법 등을 바꾸어 새롭게 하자는 목표로 등장한 정치당파로 민중파(民衆派)라 한다. 공화정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벌족파와 반대 의견을 가지고 제국 탄생에 대한 새로운 정치형태와 개혁을 지향한 정치 집단이다. 벌족파(閥族派, optimates)는 ‘옵티마테스(最善의 사람들)’ 번역어로, 포풀라레스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집단을 말한다. 원로원(元老院)에 대한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며, 원로원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려고 하는 정치 집단이다.  공화정 말기 로마 내란은 벌족파와 평민파와의 정쟁(政爭)이었다.
 
루비콘강
루비콘 강은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강에 대한 라틴어 이름이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라는 뜻은 되돌아 갈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쓰이는 말이며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을 시도할 때, 법칙을 깨는 용기와 결단을 내릴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루비콘 강을 군대를 데리고 건너게 되면 로마에 대한 반역이 된다. 기원전 49년 로마에 있던 품페이우스와 원로원이 시저의 세력에 위협을 느껴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 귀환을 명령하자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 졌다”라며 루비콘 강을 건너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딕타토르(dictator, 독재자)
임기 6개월 동안 특별 권력을 부여받은 로마 공화국의 임시 행정관으로 독재관(獨裁官)으로 번역 된다. 원로원의 추천을 받아 콘술(집정관)이 지명했고 코미티아 쿠리아타(평민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의 몇몇 라틴 국가에서는 상설직이었지만 로마에서는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서만 임명했고 나중에는 국내에 위기가 닥칠 때만 뽑았다. 딕타토르 권력은 위기가 지나가면 보통 사직한다. 딕타토르가 있는 동안 콘술이나 다른 행정관들은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권한에 복종해야 했다.
 
율리우스력(julius曆)
태양력(太陽曆)의 하나로 로마 집정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이집트의 천문학자 소시게네스(sosigenes)의 의견에 따라 개정한 세력(歲曆)이다. 365일 6시를 1년으로 하고 4년마다 하루의 윤일(閏日)을 두었다. 후에 수차의 개정을 거쳐 현행의 태양력이 되었다. ≒구태양력·줄리안력.
 
그레고리력(gregory曆) 
1582년에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십삼세가 종래의 율리우스력을 고쳐서 만든 태양력. 율리우스력에서는 400년 동안 윤년을 100회 둔 것과 달리 97회의 윤년을 두어서 태양의 위치와 책력을 훨씬 잘 맞게 하였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서 채용하고 있다. ≒그레고리우스력.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63.9.23~ad14.8.19)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내정의 충실을 기함으로써 41년간의 통치기간 중에 로마의 평화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생각해 보기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무능함에 국가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때문에 왕보다는 딕타토르(dictator, 독재자)가 되길 원했다. 이후 로마는 제정이 확립되고 제정은 로마제국을 안정된 상태로 이끌어 간다. 폭군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카이사르가 제정을 도입한 것은 이후 로마의 역사를 위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정치상황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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