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밀한 심적 고통을 견디어내는 방식
내밀한 심적 고통을 견디어내는 방식
  • 최용석
  • 승인 2009.08.31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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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진의 『비밀』
▲ 서하진 작가     © 독서신문

서하진의 『비밀』은 언뜻 보아 평범하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개인의 내밀한 상흔의 고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금기와 욕망의 틈에서 연유하는 그 아픔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떠오른, 작중 인물의 기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내적 고통이 금기나 질서에 어긋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 타인과의 공감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공감될 수 없는 만큼 그 고통은 실제 이상으로 당사자를 괴롭힐 수 있다. 기억이 전하는 고통은, 마치 온몸으로 전이된 암세포의 그것이 그러하듯 당사자의 평범한 일상조차 허락지 않는다.

이 작품은 작중 ‘정수’와 ‘민주’가 내밀한 심적 고통을 달래고자 찾은 금식원에서의 열흘간의 갈등적 체험을 적고 있다. 금식원은 감량을 통한 신체적 질병의 치료나 감량 그 자체를 목적으로 금식을 체계적으로 행하는 곳이다. 그리고 금식의 실패 여부는 개인의 인내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수’와 ‘민주’는 정상 체중으로 질병도 없기에 굳이 금식원을 찾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중 감량’에 대한 이들 인물의 반응은 다분히 자학적이거나 신경질적이다. 작중에서 ‘정수’와 같은 방에 든 ‘선희’의 금식과 관련한 반응에 비춰볼 때 이런 사실은 뚜렷이 확인된다.

‘선희’는 금식원에서의 칠 일 금식을 견디지 못하고 금식 닷새째, 결국 귀가한다. 이는 그녀의 인내력이 부족한 탓이거나 ‘체중 감량’에 대한 절심함이 덜한 때문일 수 있다. 그도 아니면 ‘체중 감량’이 그녀의 일상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수’와 ‘민주’의 금식이 단순한 체중 감량이나 질병 치료의 차원에서 선택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섯째 날, 두 사람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선희’의 빈자리가 ‘민주’로 채워지면서 그 진짜 이유가 밝혀진다.
 
이제 한 방에서 지내야 하는 두 사람은 과거 이 곳 금식원에서 자신들의 아픈 기억을 공유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 사람 모두, 다시 만난 상대에게 반가움이나 편안함에 앞서 거부감과 불안감을 보인다는 점이다. 개인이 애써 외면하고픈 자신의 비밀이나 약점을 알고 있는 타인을 꺼리는 것은 이런 연유일 성싶다. 개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비밀이나 약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적 상처의 되새김은 흔히 성찰이나 반성에 앞서 고통과 혼란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완성의 순간에 즈음하여 그 내용이 온전히 드러나는 퍼즐 그림처럼, 산발적으로 전하던 ‘정수’와 ‘민주’의 불행의 조각은 결말에 이르러 그 윤곽을 선명히 드러낸다. 먼저 신경질적인 ‘민주’는 퇴원 전날 밤, 신변을 비관하여 금식원 야외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과거, 모델인 그녀에겐 애인이 있었고, 이를 눈치 챈 남편은 자식과 그녀의 명성과 아름다움까지 모두 앗아간다. 이후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가난의 굴레에도 얽매이면서 정신적으로 거의 폐인의 지경에 이른다. 

반면, 불륜 탓에 자식을 잃었다는 죄책감으로 ‘정수’의 나날도 고통과 혼동으로 빠져들고 있었으나, 이제 ‘정수’는 자살 미수로 탈진한 ‘민주’를 향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음으로써 한 가닥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소통은 개인의 내면적 고통을 일정하게 덜어주긴 하지만 한계는 있게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나쁜 기억을 호출하는 한, 그녀는 기억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민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살 시도가 남긴 목의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 감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마음속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어려울 듯싶다. 왜냐하면 개인의 일상은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영위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쁜 기억이 주는 고통은 금기의 준수와 관련한 개인의 인식(기억) 여하에 결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기억의 상실 또는 금기에 대한 기억(인식)의 변화가 없는 한, 그녀의 아픔은 계속될 것이 자명하다.

실제로 내면에 각인된 기억은 예상보다 훨씬 견고하고 고집스럽다. 그런 점에서 ‘정수’의 의식에 떠오른, 낡은 담벼락의 틈에 자신의 비밀을 봉한 후 결코 잊지는 못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그 자리를 다시 찾지 않는 한 남자에 관한 영상은 고통과 좌절을 수반하는 나쁜 기억의 재현은 봉인돼야 한다는 암시로 읽힌다. 따라서 되도록 좋은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한다는 평범한 글귀는 일탈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새삼 유의미한 덕목으로 부각될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기억에도 얽매이지 않는, 현재의 삶에 충실한 태도가 보태질 수 있을 것이다.

 / 최용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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