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의 분노
가진 자의 분노
  • 김동민
  • 승인 2005.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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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 (소설가 · 문학평론가)
그는 내 친구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다.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그렇다. 택시회사와 공업사, 벽돌 공장. 이렇게 세 개 기업의 대표 명함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당연히 돈 씀씀이도 대단하다. 월급쟁이 내 기준으로 볼 때 물쓰듯 펑펑 써댄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우정’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그는 음식점이든 술집이든 늘 자기 지갑을 연다. 벼룩도 낯짝이 있고 빈대도 허리는 있는 법이라고, 그가 열 번쯤 지불한 뒤 내가 한 차례 계산하려 하면, 그는 당장 절교라도 할 것처럼 야단이다.
월급쟁이가 무슨 여윳돈이 있어 그러냐고. 결국 에라, 모르겠다. 내가 안 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려 하는데도 너가 그렇게 말리니, 어쩔 도리 있나. 그래, 돈 많은 니가 팍팍 써라. 원활한 경제 유통을 위해서도 그게 더 바람직할 테니까. 끝내 나는 그렇게 마음 다져먹고 ‘뻔대’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날 그는 유난히 기분 째지는 눈치였다. 골탕 먹이던 바이어가 마침내 오케이 싸인을 내렸다나 뭐라나. 그래 오늘 진짜 기찬 데 가서 한턱 아니라 열턱도 쏘겠다며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나 또한 특별히 다른 일도 없고 해서 만나자 약속했다. 장소는 시내에서 제일 ‘잘나가는’ 고급 요정이었다. 쭉쭉 빵빵 아가씨들이 쪽쪽 뺨에 입 맞추는.
 그런데 솔직히 나는 부담스러웠다.
물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를 따라 내 월급 갖고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술집을 여러 번 출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래도 그날 장소는 겁부터 먹게 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못 나가겠다 할까 하다가, 에라이, 이 못난 인간아. 두 쪽 멀쩡한 사내 대장부가 그리 소심해서야 어찌 머리 위에 하늘 이고 살 것이냐. 그런 꼴이니 백날 천날 쥐꼬랑지만한 월급 갖고 학질환자같이 벌벌 떨지. 혼자 오기도 솟고 해서 그냥 가기로 했다.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쯤 늦게 나갔다. 그런 곳에 혼자 앉아 있을 용기가 없었으니 나란 인간 어쨌든 한심했다.
 요정 ‘유토피아’는 상호처럼 별유천지비인간이요 신세계였다. 사내들 이상향. 친구는 이미 여러 잔 들이켠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는 양주병이 즐비했다. 셋이나 되는 팔등신 아가씨들이 매상 올리느라 같이 퍼댔는지 그녀들도 인사불성처럼 보였다.
일부러 그런다는 걸 나도 이제 모르진 않았지만. 중국 영화에 나오는 중국 황제 침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곳은 온통 끈적끈적한 공기가 감돌았다.

 “어이, 내 부처님 친구. 어서 오시게. 야, 야! 이것들아. 너희들 말야. 오늘 부처님 아랫도리 못 벗기면 팁이고 술값이고 모두 없다 이거야. 알겠어?”

 아가씨들이 까르르 웃었다. 내 하반신을 만지려는 아가씨도 있어 나는 송충이 털 듯 그녀 손을 탁 쳐버렸다. 꽤 아팠을 텐데도 그녀는 간드러진 웃음을 터트리며 ‘오늘 난 부처님 애인!’ 하며 적극 공세로 나왔다. 친구는 그녀에게 지폐 몇 장을 던져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 주워먹듯 그녀는 허겁지겁 그것을 집어들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몸 어딘가에 쑤셔 넣었다.

 광란의 자리였다. 부처님도 돌아앉을. 친구는 오늘 엄청난 걸 한 건(件) 잡았으니 이 술집에 있는 양주 모두 가져오라고 위세 부렸다. 모르긴 해도 내 몇 달치 월급은 벌써 나갔겠지 하고 속계산할 때쯤에야 술자리는 파할 낌새였다. 그가 너무 취한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가 술값을 지불하니 나는 헤어지기 전까진 그의 충실한 보디가드라도 돼야 한다는 얼간이 같은 강박감 때문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어쨌든 그는 아가씨와 2차를 갈 테고 나는 탈주해야 한다는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그는 뜻밖에도 이런 말을 했다.

 “야, 친구야. 우리 오늘은 수컷끼리 노올자.”

 예상 못한 소리였다. 놀란 건 나뿐만 아니라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가씨 하나가 쪼르르 달려나가 마담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마담이 들어오더니 친구에게 어디 기분 나쁜 일 있었느냐, 얘들 서비스가 시원찮더냐, 당장 새 영계 바쳐 올릴까, 달라붙는다.
 그러나 친구는 주색과는 거리가 먼 사람같이 오늘은 색을 멀리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잠깐 눈치를 살피던 마담이 말했다.

 “어제 다른 데서 힘 좀 쓰신 모양이네? 호호. 야들아. 어디 세상 모든 물이 수도꼭지 물 나오듯 그리 펑펑 쏟아지겠냐. 사장님 곱게 보내 드려라. 그리고 그 뭣이냐. 영변 약산 진달래꽃은 아니더라도 저기 카운터에 있는 조화라도 가시는 길 앞에 뿌려 드려라.”

 어쩌구 저쩌구. 한참 조악한 엉터리 시 구절을 들은 끝에 밖으로 나왔다. 찬 밤공기가 이마에 와 닿자 그는 약간 정신이 나는 듯했다. 그는 씩씩대는 황소같이 코로 입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잠시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콜택시를 호출할까 궁리하는데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솔직히 오늘 그 지독한 바이어놈하고 씨름하느라 정력 다 뺐다야. 꽤 삼삼한 갈치들인데 섭섭타 그지? 조만간 또 오자. 그 대신 내가 사과하는 뜻에서 입가심으로 소주 한 잔 더 살게.”

 그는 주객전도되는 소릴 했다.

 “비싼 양주는 못 사도 소주 정도는 내가 사야지.”
 “야, 야, 친구야. 누가 사든 일단 가자구.”

 개 눈엔 뭐만 보인다고, 술꾼 눈에 또 금방 들어오는 게 저만큼 있는 주황색 포장마차였다. 그가 앞장서서 포장을 들추었고 나도 곧 따라 들어갔다. 조금 전 요정이 내 망막에 그대로 남아 있는 탓인지 그 안은 평소 느낄 때보다 훨씬 초라하고 궁상맞아 보였다.

 그런데 그런 감정에 오래 젖어 있을 틈도 없는 일이 생겼다. 우리가 거기 나무 걸상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기역 자 형으로 놓인 한쪽 구석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한 젊은 친구가 놀라 몸을 일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사, 사장님! 그가 흘낏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 생산부에 있는….”

 젊은이가 말했다. 그는 아는 듯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아, 그래? 그건 그렇고 여긴 웬일야?”

 그의 공장 생산직으로 있다는 청년은 난감한 빛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보다 못해 내가 끼어 들었다.

 “아, 술 한잔 마시러 왔겠지. 포장마차에 또 뭔 일 볼 게 있겠어.”

 한데 참 묘한 게 그의 반응이었다. 그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꼭 벌거지 씹은 상이었다. 더욱 당황해하는 건 젊은 친구였다. 마치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하더니, 아저씨, 여기 얼마예요?
하고 급히 계산부터 했다. 내가 얼핏 보니 소주병 속에는 아직 술이 반이나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젊은이는 곧 친구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어딘지 건강해 보이지 않는 안색의 왜소한 체구였다. 터벅머리가 까닭 없이 슬퍼 보이는. 나는 미안했다. 그 젊은이가 술도 못 마시고 나가게 한 사실에.
 그런데 다음에 보이는 그의 태도는…. 나는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는 우선 거기서 제일 비싼 (비싸봐야 그 요정에 비하면 애들 과자값 같은) 안주와 소주를 시킨 후 이렇게 불만과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었다.

 “허, 그 친구. 다시 봐야겠어. 그렇게 안 봤는데 오늘 보니 영 형편없는 놈 아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청년이 뭘 잘못했다고 그래? 그냥 공손히 인사하고 나갔을 뿐인데….”

 내 말에 그는 홀연 술기운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라구.”
 “아니라니?”
 “그 자식 집안이 형편없다고 알고 있거든. 오죽하면 그 많은 공장 애들 중에 내가 알고 있겠냐구. 홀어미가 키웠는데 그 홀어미가 무슨 큰 병인가에 걸려 수술비만 해도 몇 백인가 들었다고 하데? 그래 안 됐다고 내가 위로금도 좀 줬는데….”
 “….”
 “그런데, 그런 놈이 술이나 퍼마시러 다녀? 못된 새끼야.”
 나는 언성을 높이는 자신을 보았다.
 “아, 그도 사람이고, 스트레스도 더 받을 테고, 그러니 포장마차 와서 소주 한 잔 할 수도 있잖아. 그런 걸 갖고 왜 야단야?”

 그러나 그는 한층 열을 올렸다.

 “내 말은, 그런 처지라면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거야. 돈도 없는 가난뱅이 주제에….”
 나는 할 말을 잊고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방금막 수백 만원을 쓰고 나왔지 않으냐. 그런데 기껏 소주 한 병 사 마신다고 저렇게 흥분하다니.
 나는 보고야 말았다. 슬픈, 그리고 우스운 틈새를.
 
독서신문 1386호 [200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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